우리가 처음 만난 건 파주의 어느 프랜차이즈 카페 앞, 그로부터 반년 간 우리를 무시무시하게 괴롭히게 될 사수의 랜드로버 차 안이었다. 언니는 마치 없는 사람인 양 뒷좌석에 숨죽인 채 앉아 있었는데, 얼마나 기척이 없었는지 나는 조수석에 올라타 사무실로 이동하는 내내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사수의 질문에 답하는 조그만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간단한 면접과 사무실 탐방이 끝난 뒤 경의중앙선 역사에 함께 떨구어진 우리는 그제야 제대로 된 통성명을 하게 되었는데,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건 두 사람 다 혼자만의 공간을 무척이나 존중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다. 플랫폼에서 짧고 의무적인 사담 몇 마디를 나눈 뒤에 열차의 같은 칸에 올라탄 우리는 눈짓으로 이해한다는 듯 양해를 구하며 각자의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함께 고생한 게 반년, 그 정으로 이어온 인연이 4년. 서로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없는 편한 친구가 된 우리는 부산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첫 만남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다. 우리는 마음껏 떠들 공간만 있으면 하루종일 캐치볼 하듯 대화를 멈추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한 성향이다. 어릴 적에 애니메이션을 제법 오타쿠처럼 좋아했던 점이며, 대학 졸업 후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운 후에야 영화 일을 결심하게 된 궤적까지도 비슷하다. 그래서 서로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까 염려하며 눈치 볼 필요 없이 얼마든지 자기답게 이상해질 수 있는 사이다.
깡통시장에서 푸짐하게 점심을 먹고 숙소에 짐을 내려놓은 뒤 곧장 다음 행선지인 영도로 향했다. 굽이진 길을 지나 익숙하면서도 낯선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자 수상한 언덕이 눈앞에 펼쳐졌다. 순간 우리를 둘러싼 모든 풍경이 영화 같고 의미심장해 보였다. 나는 언젠가 영도에 한 번 들어갔던 사람은 반드시 다시 영도를 찾게 된다는 미신에 관해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런 미신까지도 우리의 지금을 영화의 한 장면으로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영도를 여행하게 된 건 우연이었다. 숙박 어플에서 발견한 호텔이 저렴하고 깔끔했는데, 알고 보니 영도 다리로 통하는 길목의 바로 초입에 위치해 있었다. 영도는 우리를 은근히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면허는 있으나 운전을 꺼리는 점까지 같은 우리는 부산의 지하철과 버스를 야무지게 이용했다. 영도를 깊숙이 한 바퀴 도는 마을버스는 부산 특유의 거친 운전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자고로 여행이라는 장르는 일상이었다면 싫게 느껴졌을 불편함마저 그럴듯한 감상으로 포장하게 하는 힘이 있다. 더군다나 그런 재미를 아는 사람과 함께라면 언젠가 본 적 있는 듯한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까지 느낄 수 있다.
우린 모두 TV 보며 자랐잖아?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중
멈추는 법을 모르는 우리들은 그렇게 신기숲까지 올랐다. 신기숲은 이름처럼 신묘하고 기이했다.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녹음 가득한 풍경. 그리고 쑥 라떼와 흙을 닮은 레밍턴 케이크까지. 카페 내부의 천장에는 마른 나뭇가지가 멋들어지게 자리를 잡은 채 공간에 존재감을 부여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녹아내린 듯이 반쯤 누워 있는 손님들은 히피처럼 자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역시나 카페에 들어선 순간부터 우리의 몸과 입은 쉬지 않았다. 늘어진 히피들 사이에서 우리만이 춤추는 히피들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지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같이 봤던 영화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인데, 쿠엔틴 타란티노를 가장 좋아하는 언니와 함께 지방 촬영 중 개봉일에 맞춰 관람했던 일이 기억난다. 둘 다 고된 노동에 지쳐 영화 시작과 동시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약속한 듯 곯아떨어졌다. 둘 중 영화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마 전 언니는 드디어 영화를 제대로 봤다고 고백했고, 나도 마찬가지로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보고 이제껏 몰랐던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나중에야 영화를 제대로 보게 된 것 또한 계획된 시나리오였을까? 신기하게도 영화는 지금 우리의 교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릭은 언니, 클리프는 나였다. 스턴트맨 클리프는 참전 용사였고, TV에서 본 킬러들을 따라 하는 히피들에게 진짜 킬러의 솜씨를 보여준다. 한물 간 배우라는 사실에 줄곧 자괴감에 빠져 있던 릭은 자신이 출연한 작품 속에서 휘두른 적이 있는 화염 방사기로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배우는 배우다. 히피들을 처단한 건 스턴트맨 클리프지만 마지막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릭이다. 어쩜 진작에 낙오된 나와 달리 아직까지 꿋꿋이 영화를 하고 있는 건 언니라는 사실까지 빼다 박았을까.
우리가 각자 달리고 있던 선로는 제법 그 간격이 멀어졌다. 언니는 여전히 영화 일을 하고 있고 나는 궤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태양계에 편입되기 위해 노력 중이다. 한때 같은 꿈을 꾸던 우리는 이제 그 꿈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저마다 새로 가진 꿈을 생각나는 대로 넌지시 뱉고 듣는다. 같은 꿈을 꿀 때만큼이나 각자 새로 빚은 꿈을 얘기하는 시간이 얼마나 흥미롭고 즐거운지, 같은 영화 현장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던 약속마저 이제는 아무래도 괜찮다.
어느 날 아침 문득, 정말이지 맹세코 아무런 계시나 암시도 없었는데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나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모순>, 양귀자
나는 언니에게 줄곧 말했다. 내가 보는 언니는 심지가 강한 사람인 것 같다고. 그런 내 말에 언니는 갸우뚱하다가도 생각이 날 때면 종종 그 얘기를 다시 꺼내어보곤 했다. 그때 네가 말한 것이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언니 또한 나에게 줄곧 말했다. 언니가 보는 나는 의지가 강한 사람인 것 같다고. 그 의지가 어떤 식으로든 기회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고. 곰곰 생각해 보니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 같기도 했다. 내 사주가 딱 제 복에 제가 사는 사주랬는데, 멈추는 법을 모르는 게 때로는 피곤할 때도 있지만 결국 그게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다행이라 생각할 때가 있다. 어쨌든 언니도 나도 결코 수동적인 인간은 아닌 게 분명하다. 우리 둘 다 사랑해 마지않는 <모순>의 안진진처럼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기에, 우리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하기에 움직이고, 멈추지 않는 인간들이다.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하는 나도 언니가 카메라를 들이대면 별 수 없이 포즈를 취한다. 마치 전문 모델처럼 카메라 앞에서 거침이 없는 그녀를 보면 나도 거울처럼 닮고 마는 모양이다. 신기숲에서 나는 평소라면 유난이라며 눈 흘겼을 누군가들처럼 녹음이 우거진 창가에 앉아 언니의 앵글에 담기고 또 담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는 라떼가 식는 줄도 모르게, 그렇게 좋아하는 디저트 케이크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그래도 할 말이 남아서 우리는 그날 밤을 새울 뻔할 만큼 이야기를 나누다 약속한 듯 일시에 곯아떨어졌다. 우리의 만남은 매번 그런 식이다. 지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신기숲으로 올라가는 길 중간에 마주친 절에는 소원을 들어주는 돌이 있었는데 끊임없이 시도하고 변화하는 우리에게 하나만 콕 집어 말할 수 있는 소원이란 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소원돌이라는 게 있대” 하며 깔깔 웃어넘긴 뒤에 하던 대로 걷고 또 걷고, 오르고 또 오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