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진부한 문장 하나가 있다.
“삶은 여행이다.”
삶이 이미 여행이라면 우리는 왜 시간과 돈을 들여 일상 밖의 장소로 여행을 떠날까? 더군다나 여행지에서조차 일상의 호흡을 고집하려 하는 나에게는 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행지의 카페에서 나는 대체 무엇을 관찰하며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커피만을 즐기기 위해서 였다면 나는 굳이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잘 볶아진 원두를 여러 봉지 사서 집에 있는 커피메이커로 내려 마시면 그만일테니. 비밀은 시간이다. 커피를 마시는 시간. 그 시간을 메우는 여유의 자리. 그 자리에는 삶에 치인 채로는 불가능했던 생각이나 대화가 들어설 수밖에 없다. 그 빈 자리를 채울 무언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우리는 카페를 찾는 것이리라. 여행도 그렇다. 여행을 하는 시간 동안 선물처럼 떠안게 되는 여유. 어떤 식으로든 조금씩 현실과 어긋나있는, 그 순간을 목도하기를 기대하며 여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삶을 어떻게든 변화시키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핀란드에서 인도네시아, 그리고 돌고 돌아 서울까지. 지난 10여년 간 곳곳을 여행했고 생각한 것들에 대해 썼다. 혼자 다닌 여행도 있었고 함께 다닌 여행도 있었지만, 솔직히 여행은 개인적인 역사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글을 정리해 나가며 놀란 점은 나의 여행 이야기의 대부분에 타인이 녹아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오로지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일에만 몰두해 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갈망하며 여행한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지마다 카페를 찾아 충분한 시간을 보낸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 싶고. 카페라는 공간이 그렇지 않은가. 관찰하고, 관찰당하고, 대화하고, 또 때로 가볍게도 깊게도 엮이는.
좀처럼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하는 나를 아는 친구들은 알아서 나 몰래 내 뒷모습을 찍곤 한다. 뒷모습을 찍어주는 친구들을 생각하면 괜히 고마운데, 그건 앞서가는 나를 보며 서운함이나 거리감 따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나를 든든하게 믿어주고 있는 것 같아서다. 비약일지도 모르겠다.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어도 따로인 것 같은 순간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게 때로 상대방을 외롭게 만들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한때 나를 억지로 뜯어 고치려고 애쓴 적이 있다. 하지만 사진첩을 넘겨보다 생각했다. 내가 나답게 이상해질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친구들은 이런저런 생각할 새 없이 이미 나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느라 바쁘다. 어느 봄날 을지로를 함께 산책했던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현상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좋다고. 타인과 상황에 대한 비약과 상상은 오해를 낳을 뿐이라고. 뒷모습은 그저 뒷모습이고, 침묵은 그저 침묵일 뿐이다. 더해지는 대화와 공감에 따라 때로 간단한 수식어 몇 개가 덧붙여질 것이다. 멋진 뒷모습이나 여유로운 침묵처럼.
얼마 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구본창의 항해’ 전을 보고 왔다. 사진작가 구본창이 72년 촬영한 자신의 뒷모습 ‘자화상’은 사실 친구에게 부탁해 찍은 사진인데 그 배경을 알고 봐서 그런지 뒷모습에서는 쓸쓸함보다 신뢰가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다. 정물을 그린다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그랬다. 대상이 존재하기 위해서 배경이 있어야 하니 항상 대상과 주변의 관계를 잘 살펴봐야 하는 일. 나는 내 뒷모습 찍어주는 이들 덕분에 나다워질 수 있다. 혼자서는 안 된다 이말씀. 또한 정물을 그린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표현하되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이다. 역시나 비약과 상상은 금물이다.
Be careful, you are not in Wonderland. I've heard the strange madness long growing in your soul. But you are fortunate in your ignorance, in your isolation. You who have suffered, find where love hides. Give, share, lose—lest we die, unbloomed.
주의하라, 네가 있는 곳은 동화 속 세계가 아니다. 네 영혼 안에는 광기가 자라고 있다. 하지만 네 무지와 고독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너, 숨은 사랑을 찾느라 고통받은 자여. 주고, 나누고, 잃어라—피어나지 못한 채 죽지 않도록.
-영화 <킬 유어 달링스> 중
나는 앞으로도 여행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글을 통해 경험을 주고, 생각을 나누고, 외로움을 잃은 지금, 이전과는 다른 여행을 만들어 볼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곁에 있다. 우리가 여행하는 삶은 동화 속 모험보다는 거친 풍파를 헤치는 일에 더 가까울 수도 있겠지만 그 시간을 함께할 타인이 있기에, 혹은 여행하는 나라는 대상을 존재하게 하는 배경이 있기에, 외롭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잃지 말아야 할 것은 여유다. 여행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더라도 우리가 결국 돌아와야 할 곳은 일상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