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 연차

by 거의모든것의리뷰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병원에서 약도 받고 수액도 맞았지만 쉽게 낫지는 않는다. 최근에 이렇게 힘이 빠지는 날은 많이 없었던 것 같은데, 연말과 연초에 약속이 많았던 탓인지, 유난히도 추운 겨울의 한가운데에 놓여져 있던 탓인지 그 모든게 어우러져 이런 결과를 만든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일요일부터 뭔가 몸이 수상했다. 피곤하고 빨리 자야할 것 같은 느낌을 주었고 월요일 아침에 상쾌하게 일어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월요일 저녁에 갑자기 배가 슬슬 아프고 헛구역질을 했다. 어제 문득, 회사에서 누군가가 노로바이러스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나랑은 아주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주말에 먹은 굴 생각이 났다. 하지만 고작 석화 한개였다. 굴보쌈과 같이 굴을 하나의 메인 음식으로 많이 먹었으면 의심이라도 하겠지만, 코스의 일부분으로 딱 한개 나왔는데 그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원인이든 몸은 내게 쉬고 싶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연차를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누가봐도 썩 좋지 않아보이는 상태로 연차를 얘기하니 어렵지 않게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직장인들의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일을 하지 않고도 돈을 받을 수 있는 연차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당연히 직장에서는 연차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영업자와 프리랜서로서는 가장 부러워할만한 복지다. 게다가 같은 직장인들끼리도 연차가 아주 많은 현대차그룹을 부러워하고 쉬는 날이 많을 수록 좋은 건 사실이라 다다익선의 대표적인 예시다.


연차를 쓰고 뭘 할까를 생각해보면 두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놀기 위한 연차와 그렇지 않은 연차. 여행을 가기 위한 장기연차다. 금요일이나 월요일에 붙여서 쓰거나 이틀을 써서 3박 4일의 여정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가끔, 추석이나 설날이 다가오면 공휴일 3일을 껴서 일주일이나 길게는 2주까지 통으로 쉬기도 한다. 그 연차는 말 그대로 refresh 를 위함이다.


연차를 위해 회사를 다니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새로운 분기점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줄 수 있다. 생각해보면 여행을 가기 빙글빙글 도는 회사의 하루에서 벗어나는 것. 금요일만 기다리는 일주일을 건너뛰는 것. 연차는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다. 한달 전부터 계획을 하고, 숙소와 일정을 짜면서 그 날을 기다리는 건 학생때나 직장을 다닐때나 똑같을텐데 유난히 더 D-X 에 의미를 부여하는건, 그만큼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다. 거기에 여행을 많이 갈수록 더 많은 돈을 소비하는 것이 필연적이라, 더 오랫동안 회사에 남아 충성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낸달까. 노는 연차 후에 바로 회사로 복귀하면 자유의 실종에 대한 후유증이 남기도 하지만 그래도 연차는 꽉꽉 채워서 노는게.. 짱이지!


그렇지 않은 연차는 오늘과 같이 내 몸이 나의 일정을 따라오지 못하거나, 전세 계약이나 은행을 가야하는 등 공적인 일이 있을 때 발생한다. 모든 사람의 근무시간이 대체로 같은 시간이라 어쩔 수 없다. 직장에 다니지 않을 때는, 은행에는 왜 항상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직장에 다녀보니 다른 사람들은 일을 하고 있는 시간이었다. 사실 아파서 쓰는 연차가 가장 억울하다. 연차 하나하나가 소중한데, 계획적이지도 않고, 집에서 누워있어야하는 연차는 어쩔 수 없지만 정말 필요하지만 아깝기도 하다. 언젠가 놀 수 있었는데, 놀 수 없는 미래의 기회를 빼앗긴 느낌이랄까?


이 연차는 사실 그렇게 오래걸리지는 않는다. 오전을 쓰거나 오후를 쓸 수는 있는데, 하루 종일 무엇을 하지는 않는다. 대게 오전에 일을 마치고 오후에는 잠깐의 휴식을 향유할 수 있는데, 오후의 휴식을 갖기 위해 카페를 찾거나 오랜만에 점심을 밖에서 먹다보면 참, 사람들이 많다. 아니 나는 겨우겨우 연차를 내서 쉬고 있는데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모든 사람이 연차를 내고 여기 있는 건 아닐 것 같은데 괜히 억울하다. 나만 이렇게 회사에 종속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걸까? 나도 회사를 다니지 않고 이렇게 유유자적하게 잘 살아갈 수 있는데, 왜 나는, 내 친구들은 여기 있는 사람과 다른 삶을 사는걸까 억울함이 한숨이 되고, 한숨은 아이스아메리카노에서 공기방울이 되어 보글보글 올라온다. 아냐, 각자의 사정이 있겠지. 누군가는 내가 불평하면서 다니는 회사를 가기 위해 공부를 하면서 직장인을 부러워하며 어떤 직장을 들어가고 싶은지 일기에 적고 있을지도 몰라. 나도 그럴 때가 있었으니까.


연차 때문인건지, 전날 그래도 빨리 잠을 청해서 그런지 오늘은 몸이 괜찮아졌다. 아닌가? 회사를 안가서 기분이 좋은건가? 아침에는 그래도 푹 쉬었는데 아프던 몸이 조금 좋아졌다는 느낌과 함께 조금 답답해져 카페에 왔다.


아직 날씨가 쌀쌀한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카노를 한잔 시키고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다. 한편에서는 어머니들이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창밖의 아저씨는 눈 둘곳을 찾지 못한 채 담배를 피며 이리저리 바라보는 방향을 바꾸고 있다. 아직 공기가 찬데, 안춥나? 이 예상치 못한 연차와 예상치 못한 시간과 공간에 내가 부러워하는 이들과 나를 부러워하는 이들이 서로의 생각을 모른채 어우러져 있겠지. 그리고 어쩌면 서로를 보며 부러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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