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운동
비가 오는 날 아침, 배드민턴을 쳤다.
8명이 모인 덕에 두 코트에서 돌아가면서 치면 딱이었다. 살살 내리는 빗줄기에 배드민턴이 아니었다면 러닝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가 집에서 핸드폰만 보고 있었을 텐데 그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한게임을 치고 물을 먹으러 가는 길, 수많은 사람들이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9개 코트가 가득 차서 셔틀콕이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코트마다 셔틀콕의 속도를 보면, 그 실력을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다. 잠깐 멈춰 서서 눈으로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셔틀콕이 움직이는 경기를 멍하니 바라봤다. 부러웠다. '나도 잘 치고 싶다'
가장 빠른 셔틀콕의 속도를 가진 코트의 한쪽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게임이 끝난 것 같다. 이긴 팀이 많이 기뻐했다. 그와 동시에 다른 코트에서도 경기가 끝났는지 웃으면서 대기 의자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보고 있던 팀보다 더 실력이 떨어졌던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승리의 기쁨이 배드민턴을 아주 잘 치는 팀보다 더 작아 보이지는 않았다.
문득 행복의 원인은 상대적이지만 행복의 크기는 절대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실력이 50인 사람이 60인 사람을 이겼을 때 10만큼 기쁘다고 했을 때, 실력이 100인 사람은 80인 사람을 이겨도 별로 기쁘지 않을 것이다. 100의 실력을 갖고 있는 사람은 110의 실력을 갖고 있는 사람을 이겨야만 50인 사람이 60인 사람을 이겼을 때와 동일한 행복을 느끼지 않을까. 50인 사람이 110인 사람을 이긴다면 아마 60의 실력을 가진 사람을 이겼을 때보다 아주 많이 기쁘지 않을까.
꼭 배드민턴이 아니어도 된다.
재산이 100억이 있는 사람이 투자를 통해 3억을 벌었다. 1억이 있는 사람이 1억을 벌었다. 3억을 번 사람보다 1억을 번 사람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부러웠던 대상은 절대적이었다. 배드민턴 A조에 있는 사람의 실력이 부러웠다. 압구정 한가운데 사는 이들의 재력이 부러웠다. 포르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의 차가 부러웠다. 절대적인 무언가가 부러웠다. 누군가는 그것이 SNS 때문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SNS에 드러나는 사람들의 자랑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SNS를 조심해야 한다고. 하지만 SNS가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SNS 가 아니어도 충분히 부러워할만한 사람들을 각기 갖고 있다. 때로는 부장님이 되고 때로는 바로 옆 친구가 된다. 그들이 갖고 있는 어떤 것이 부러웠을 뿐이다. 내 결핍을 채워줄 무언가를.
문제는, 그 결핍이 채워진다고 해서 부러움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이 없던 시절에는 돈이 부러웠다. 직장을 얻고 나니 이번엔 그때의 자유로운 시간이 아쉬워졌다. 지금은 더 큰 부를 원하고, 언젠가 그걸 가지면 지금의 젊음을 그리워할 것이다. 결핍의 대상은 계속 바뀐다. 부러움은 채워지는 게 아니라, 이동하는 것이다.
"지금에 만족해야 한다"가 아니다. 그 부러움을 흘려보내고, 어제의 내가 바랬던 오늘의 나를 지금 코트에 있는 나에 더 집중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오늘은 그것으로도 괜찮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