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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잘쓰는헤찌 Sep 01. 2022

혁명의 싱크대

혁명 4화

#1

“여보네 집은 왜 남자가 부엌 못 들어가게 해?”


어?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냥 늘 하던 대로, 음식 잘하는 이모들과 엄마가 하겠지.

 우리는 그냥 필요해 보이는 잡일을 조금씩 돕고, 

앉아서 놀고 있으면 됐다.

외가 식구들과 다 같이 펜션에서 놀았던 날이었다. 

부엌에서 일한 사람은 딱 세 명이다.

 바로 큰 이모, 작은 이모, 우리 엄마. 


그리고 거실에서 과일 깎고 있는 외숙모도 일하고 있다. 

그들은 평온하게 일을 하고 있고, 

마치 조화로운 톱니바퀴가 뚝딱하며 돌아가듯 평화롭다. 

그 맞은 편에 둘러앉아서 술 마시던 사람도 딱 세 명이다. 

나, 사촌 언니, 외삼촌. 우리는 이 무리에서 막내 라인이니까 

앉아서 엄마들이 해주는 음식을 받아먹으면 된다. 

물론 아빠들이 오면 우리가 일해야 하지만.

그리고 편히 앉지도 그렇다고 돕지도 못한 사람은 딱 두 명이다. 

바깥 손님으로 대접받는 사촌 언니네 형부랑 내 남편.

그들은 장모님이 일하고 있으니 편히 앉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부엌에 어슬렁거리면 쫓겨나기 일쑤였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뭐 우리 할머니처럼 ‘남자가 부엌에 들어오면 고추 떨어진다’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그냥 손님이니까 못 들어오게 하셨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의 눈엔 꽤나 이상한 광경이었다. 

다 같이 놀러 온 펜션에 일하는 사람만 한다니. 

남편의 눈에는 꽤나 이상한 광경이었다.



#2

1990년 백말띠. 백말띠 해의 여자는 드세다고 하여 

여아 낙태가 많이 일어났던 해에 태어난 여자다. 

이름은 최00. 

아주 역사가 유구한 경주 최씨 종갓집 자손으로 여자임에도 항렬자를 사용함.

 할머니 집 유리 벽장에 길게 늘어진 경주 최씨 족보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음. 

집 안 사람들은 전부 의대를 나와서 의사를 하거나 보건 공무원임.

그러나 이 여자는 수학 1등급, 사회 3등급임. 

이과 과목을 더 잘했음에도 문과생의 길을 감.

이 여자는 초, 중, 고, 대학교를 모두 동일 지역에서 졸업함.

 졸업하고도 서른 살까지 동일 지역에서 근무함. 

만났던 남자도 모두 동일 지역 사람이었음. 

만났던 친구도 모두 동일 지역이었음. 

역사 및 한국 지리 과목에 매우 취약하여 

경북 남부 지방 외에 다른 지역은 잘 모름. 

네비게이션이 없으면 집 근처 카페도 못 찾아감. 

매일 가던 출퇴근 길도 네비를 켜고 운전함.



#3

“언니, 나 국토 대장정 할 때 알게 된 오빠가 있는데 한번 만나볼래?”

“어디 사는데?”

“여수”

“여수가 어디에 있는데?”

“남해 쪽에 끝에 있어”

무슨 마음이 일었을까. 

가보기로 한다.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가보기로 한다. 남녀 그런 거 모르겠고, 

그냥 전라도 여행 갈 겸 한번 가보기로 한다. 


이야, ‘오빠가 00했어.’라는 말을 안 쓴다. 

그놈의 ‘오빠가’, ‘오빠가’로 시작해서

 나중엔 ‘니가 사회생활을 덜 해봐서’로 끝나는

 지겨운 권력 놀이하는 사람들에게

 꽤나 지쳐있던 상황이었다.

 지금에서야 ‘지역이 문제가 아니라 그놈이 문제였구나’라고 느끼지만 

그 당시에 장난처럼 했던 말이 ‘경상도 남자하곤 절대 결혼 안 한다.’였다. 

그리고 그 말은 씨가 되었고, 

나는 여수사람과 결혼을 하여 

여수사람이 되었다. 


삶은 참 기묘하다.

 내가 ‘이 어려운 조건을 이겨낼 수 있을까?’라고 고민했던 상황이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 되기도 하고, 

‘내 길이다’라고 생각했던 상황이 

최악의 배신으로 얼룩지기도 한다.


국어사전에서 말하는 혁명이란,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지금까지 어쩔 수 없는 환경에 들어가지 못했던 부엌이 있다면 

우리는 문을 열고 싱크대에 서서 마주할 필요가 있다. 

그곳에서 또 어떤 경험이 나를 새롭게 최고의 선택을 만들어줄 진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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