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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Sep 22. 2019

읽고 쓰기에 대한 고뇌와 갈망이 담긴 ‘언어의 자서전’

문맹 - 아고타 그리스토프



고백컨대, 처음 책을 받아든 순간 제목과 작가를 보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어마어마한 소설을 뱉어낸 작가이기에, 그의 개인사는 굳이 알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작가가 신비로운 존재로 남아있어야 소설이 더욱 돋보이기도 하기에 마음 한구석에선 못내 미심쩍었던 게다. 살짝 눈을 흘긴 채 책장을 열었다가 먹먹한 마음으로 마지막 장을 닫았다. ‘아, 이건 생존에 대한 이야기구나’ 싶었다. 문득 그녀, 아고타 그리스토프(1935∼2011)가 궁금해졌다.  


치열한 생존게임 속에서 어떻게 작가가 됐을까? 

2차 세계대전의 빈곤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여자, 스위스에 거주하면서 프랑스어로 창작 활동을 했던 헝가리의 소설가이다. 태어나기는 헝가리 치크반드에서 태어났다.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치, 사회적인 현실이 그녀의 인생을 이렇게 복잡하게 꼬아 놨다. 극강의 성장배경은 엉뚱하게도 그녀를 최고의 소설가로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됐다. 지금까지 써왔던 소설 속 많은 사건들이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직접 경험했던 일이다. 14세 때 기숙학교에 들어가면서 가족들과 떨어져 고통스러웠고, 마르크스주의를 가르치는 학교는 그녀에게 감옥이었다. 헝가리 혁명을 피해 21세에 나라를 떠난다. 남편과 갓난아이를 데리고 피난한 곳은 스위스. 그곳에서 시계 공장에 다니며 지독한 가난과 싸웠다. 상황은 어느 하나 그녀에게 녹록한 것이 없었다. 공장도 그만두고 남편과도 헤어졌다. 


“나는 읽는다. 이것은 질병과도 같다.” 자전적 이야기 『문맹'(L'analphabète)』은 이 말도 안 되게 짧고 강력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는 쓴다'가 아니라 '나는 읽는다'라니. 그녀의 아버지는 마을에서 하나뿐인 학교의 교사이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책을 권했다. 그리고 그녀는 시작한 것이다. 질병과도 같은 행동을. 전쟁통에 현실은 처절했을지언정 그녀의 머릿속 상상보따리는 파스텔 빛으로 가득했다.    


전쟁 속에서 생존하며 애어른이 돼야 했던 소녀 

생활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에세이 곳곳에 녹아있는데 눈물겹게 힘들었을 거라고 미루어 짐작할 뿐, 책 속 어디에도 힘들었다는 표현은 없다. 책가방이 없는 아고타는 친구의 책가방에 책과 공책을 넣는 대신 가방을 들어줘야했고, 연필이나 준비물도 당연히 없어서 늘 빌려 써야 했다. 신발도 한 켤레뿐이라 수선 맡긴 날에는 그동안 신고 다닐 신발을 빌렸다. 빌릴 데가 없으면 밖에 나가지 못하고 누워서만 지냈다. 아버지는 감옥에 가있고 쥐약을 포장하며 생계를 책임지는 엄마는 늘 지쳐 보이니 그저 이 상황을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언어가 정체성을 살해한 현실에 개탄 

네 살에 글을 읽기 시작해 병적일 만큼 독서와 이야기에 빠져들었던 어린 시절부터 아고타에게 '언어'란 참으로 혼란스러웠다. 헝가리에서 태어났지만 독일어를 쓰는 곳에 살았고, 러시아어가 의무화된 학교를 다닌 탓이다. 그리고 급기야 프랑스어를 쓰는 스위스 지방에 정착하게 된다. 이후로 30년 넘게 프랑스어로 말하고 쓰고 있지만 그녀는 죽는 날까지 프랑스어를 '적어(敵語)'라고 불렀다.  이 언어가 자신의 모국어를 죽이고 있기 때문인데, 단순히 언어의 상실만은 아니었다. 언어는 생각과 행동, 가치관, 생활모습까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마치 헝가리를 집어삼킨 독재자의 침공과도 같았다.  



“우리가 영원토록 가늠해볼 수 없는 것은 독재가 동유럽 국가들의 철학, 미술, 문학에 얼마나 해로운 역할을 했는지다.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면서 소련은 이 나라들의 경제 발전만 저해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와 민족 정체성까지 말살시키려고 했다.” 



단순한 표현으로 담담하게 현실 조명  

우울한 이야기들을 들어주다 보면 스스로 감정 쓰레기통이 된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기분이 가라앉는다. 아고타의 에세이는 지난한 인생을 기술하면서도 그 와중에 낭창하다. 공장에서 단순 노동을 하면서 시를 썼다고 하는데, 기계가 시의 운율에 맞춰 규칙적인 리듬으로 반복되었기 때문에 공장은 시를 쓰는데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건조하고 담담한 와중에 희한하게 아름답다. 뒤늦게 배운 외국어로 소설을 쓰려니 그럴 수밖에.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말만 골라서 썼을 것이다. 그녀도 말도 가난했다. 하지만 이 단순함이 아코타 크리스토프의 치명적 매력이다.  


세월이 지나 이제 좀 살만해졌다. 시와 소설을 쓰면서 명예도 생겼다. 그렇지만 아고타는 행복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문맹』은 모국어인 헝가리어를 빼앗기듯 잃어버리고 헝가리인으로서의 정체성까지 위협해오던 프랑스어라는 적어를 배워야 했던 시간에 대한 조용한 싸움의 기록이자 그 상실을 메우기 위해 부단히 읽고 쓰기에 집착한 한 소설가의 이야기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어를 쓰는 작가들처럼은 프랑스어로 글을 결코 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쓸 것이다. 프랑스어로 쓰는 것, 그것은 나에게 강제된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한 문맹의 도전." 



아고타는 피난 가방을 두 개 챙겼다 

아고타가 가족들과 함께 국경을 넘어 피난 가는 와중에 그녀가 챙긴 가방은 두개. 하나는 아기 젖병과 기저귀, 하나는 사전이 들어있었다. 글에 대한 아고타의 확고한 의지에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아고타가 말하는 '작가되기'에 대한 소개로 글을 마칠까 한다.  



“무엇보다,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할 일은 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쓰는 것을 계속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누구의 흥미를 끌지 못할 때조차. 그것이 영원토록 그 누구의 흥미를 끌지 못할 것이라는 기분이 들 때조차. 원고가 서랍 안에 쌓이고, 우리가 다른 것들을 쓰다 그 쌓인 원고들을 잊어버리게 될 때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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