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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Jan 23. 2023

도박 중독자의 가족


 


'시가에서 부당한 요구를 합니다. 시동생의 빚을 갚아 주라는 건데요. 시동생은 도박 중독자입니다. 주식 투자로 시작해서 위험한 선물 옵션에 손을 댔지요. 그 과정에서 시어머니 아파트와 가족들 적금이 날아갔고요. 한번 큰돈을 벌어본 뒤에는 밤잠도 자지 않고 주식에만 매달려요. 이제는 코인을 해보겠대요. 저는 시동생이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가족들을 설득하다가 이래서 집안에 여자가 잘 들어와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시동생은 가족들 명의를 도용해서 불법 대출과 부동산 사기까지 손을 뻗었어요. 주변 지인, 이웃들 돈도 몽땅 끌어다 쓴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가족이라는 이유로 빚을 같아 줘야 한대요. 결국 도박 자금을 마련하려고 시동생은 장기 매매까지 시도했어요. 이 고통에는 끝이 없는 것 같아요. 이런 제가 일상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사연이다. 사연의 주인공은 만화가 이하진. <도박 중독자의 가족>은 도박 중독에 걸린 시동생으로 인해 온 가족이 고통 받았던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이다. 주식과 비트코인의 시대, 당신의 가족은 안녕하시냐고 안부를 묻는다. 


책은 한 사람의 주식 투자자가 어떻게 도박 중독자로 변모하는지, 그로 인해 가족이 어떻게 병드는지 선명하게 보여 준다. 도박 중독자 개인만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이 왜 그에게 휘둘리고 삶이 망가지는지 '공동 의존증'이라는 개념을 통해 들여다본다. 나아가 한 가족만이 아닌 도박으로 빨려드는 우리 시대의 명암과 그 대처법을 알려준다.  


이하진 작가는 외부인이어서 객관적일 수 있었다. 부모, 형제, 자매가 아닌 형수이자 며느리이니까. 밖에서 보면 문제가 명확하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거쳐 부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주식 공부를 한 시동생은 어머니와 형제들의 자산을 도맡아 관리한다. 하지만 리먼 사태로 인한 글로벌 금융 위기로 큰 손실을 보게 된다. 시동생은 빅 윈big win, 즉 주식으로 큰돈을 벌어 본 경험을 잊지 못하고 손실을 메우기 위해 점점 더 위험한 파생 상품에 손대기 시작하면서 도박 중독으로 나아간다.  


도박 중독자는 옆에서 돈타령을 하니까 도박을 하게 되는 거라고 항변한다. 계속 듣다보니 가족들 귀에는 이 논리가 그럴듯하게 들린다. 밖에서 이 문제를 접하는 사람들은 무슨 해괴한 논리냐고 펄쩍 뛰겠지만 도박 중독자는 그렇게 반응하지 않는다.  


왜 그렇게 되는지 설명해보자. 당신이 주식을 해서 돈을 잃었는데 갚아야 할 돈이 10억이 넘는다고 가정하자. 월급 실수령액은 3백만 원 정도로 매달 나가는 돈 외에 회생도 해야 하고 돈 빌려준 사람들이 닦달해 댄다고 가정해 본다. 다시는 도박 안한다고 몇 달은 끊는다. 배달, 대리운전 같은 투잡을 뛰면서 성실하게 돈을 마련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체력이 바닥날 즈음 이 짓을 몇 년이나 더 해야 할까 계산해 본다. 회생 3년에 가족들 돈까지 갚으려면 까마득하다. 가족들의 냉대와 멸시, 빚 독촉에 시달리는 여생은 확정이다. 평생 그렇다고 생각하니 암담하다. 자포자기 심정이 슬슬 고개를 든다. 주식 종목만 잘 고르면 몇 달만에 만회할 수 있을 텐데 몸이 부서져라 고생할 필요가 있을까. 고수익을 쫓을수록 점점 더 망해간다.  


하진은 시동생의 도박 중독 가능성을 경고하지만 가족들은 하진을 비난한다. 가족 구성원의 과오를 덮어 주고 빚을 갚아 주는 것이 당연한 의무라고 여긴 그들의 사랑은 재앙을 불러온다. 서로를 지키려던 마음은 끊임없이 배신당하고 휘둘리며 '공동 의존'이라는 심리적 질환으로 나아간다. 하진과 가족들이 불행의 고리에서 벗어나려면 문제를 인정해야 하는데 아무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대부분의 공동 의존 환자는 여성, 자식을 가진 어머니다. 자식을 두고 도망갈 수 없으니까. 어떻게든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노력했으니까. 혼자 벌어먹고 살 줄 몰라서 그런다, 멍청하게 저러고 산다 조롱당할지언정 어떻게든 가족을 지켜보려다 그렇게 된 거니까.” -p367    


이 책은 비트코인과 주식 광풍의 시대를 사는 우리의 이야기이다. 나 또한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하주원 정신과 전문의는 스스로 도박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하루에 한 캔씩 마시는 맥주, 잠깐도 꺼둘 수 없는 SNS 창, 끝끝내 삭제하지 못하는 주식 MTS나 코인 거래소 앱 모두 중독의 시그널이다.

  

인간은 약한 존재지만 약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강해질 수 있다. 이 책은 그런 우리에게 다가온 단단한 손길이다. 저자의 말대로 내가 걸린 이 병은 평생 낫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또다시 다짐하며, 오늘 하루만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 보겠노라고 내딛는 분투의 과정을 읽어 나가는 것만으로 우리의 일상은 좀 더 단단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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