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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Apr 09. 2023

여자아이이고 싶은 적 없었어



어떤 일이 잘 안 풀릴 때마다 아빠가 농담조로 했던 말. “여편네가 한 일 같군" 강렬한 첫 문구가 이 책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가만히 있는 여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불경하고 모자란 존재로 전락한다. 알게 모르게 깊숙이 뿌리내린 편견들은 죄 짓지 않은 선량한 여자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준다. 이유가 뭘까? 우리가 사는 세상의 기본값은 남성이기 때문이다.  


역사가 몇몇 남성들의 이름과 업적으로 기록된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고, 기자들이 버릇처럼 쓰는 기사에도 여성은 언제나 괄호 속에 따로 성별이 표기됐다. 사건사고 기사에 '40세 이모씨(여)'가 대표적이다. 기사에서 별다른 성별 언급이 없다면 남자라고 이해하면 된다. 얼마나 낡은 차별적 표현인가.  


그래픽노블 <여자아이이고 싶은 적 없었어>는 쥘리 델포르트 작가가 느끼는 여성의 삶에 대한 사적인 사색을 담고 있다. 명사의 성별이 구분되는 프랑스어에서는 둘 모두를 하나의 대명사나 형용사로 수식할 때 남성형으로 쓴다. 세상 대부분의 규준이 그렇듯 남성이 기본값이라는 점을 더할 나위 없이 간결하게 표현해주는 문법이다. 프랑스어 원제는 <Moi aussi, je voulais l'emporter(나도 대표하고 싶었다)>로 이 문법 규칙에서 착안한 것이다. 언제나 대표 값이 되지 못하는 여성이 온전한 삶을 욕망하는 의미를 담았다. 이후 영어로 번역되면서 <This Woman's Work>가 되었는데 원서 제목을 포함하여 이 그래픽 노블이 담고 있는 모든 작업을 ‘woman’s work’로 규정한 셈이다.


궁금하다. 한밤중에 택시를 타거나 어두운 길을 걸을 때, 싱크대 수리를 위해 집에 사람을 불러야 할 때, 남자들도 여자처럼 의심과 두려움을 느낄까? 남자 혼자 산책을 하면서 목숨과 안위까지 걸까? 아마도 어떤 위축도 없이 산뜻하게 숲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수컷 외뿔고래다. 암컷에게는 없는 외뿔을 지닌 그들은 알까? 때때로 어쩔 수 없는 여성으로서 존재의 물리력을 체감할 수밖에 없다.  


질문들의 무게와 달리 색연필로 스케치하듯 그려진 델포르트의 그림들은 산뜻하고 경쾌하다. 이야기는 작가가 평생 겪으며 살아온 트라우마를 중심으로 여성의 삶에 대해 끈덕지게 붙잡고 늘어진다. 아이가 생기면 이름은 지을지언정 온전히 맡아 돌보겠다고 약속하지 않는 남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릴 때부터 당하는 성폭력, 여자들이 당하는 피해는 으레 못 본 척하는 은밀한 수군거림들에 대해 작가는 끝없이 생각한다. 그리고 바느질을 하듯 그런 조각들을 이어 이야기를 만든다.  


더 이상 연인을 만들 수 없을까 봐 두렵다... 어떤 남자가 페미니스트를 견디겠는가. 어떤 남자를 내가 견딜 수 있겠는가. -p.202


책의 상당 부분은 작가가 선배 여성 작가인 토베 얀손에 대해 느끼는 존경과 애정, 핀란드에서의 레지던스 생활로 구성돼 있다. 세계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함을 느낄 때,  나보다 앞서 난관을 돌파한 인생 선배의 삶을 마치 등대처럼 따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작가는 이 책에서 여러 여성 예술가들의 이름과 작품을 불러내며 증명하고 있다.  


여성에 대해 생각하고 창작하는 일은 지극히 사적인 동시에 페미니즘이라는 거대한 흐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단순히 여성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표가 될 수 없는 모든 존재들, 이를테면 남성이 아니고 백인이 아니고 부유하지 않고 나이 들고 장애가 있고, 더 나아가 비인간인 모든 존재들에 대해 생각하는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두고 페미니스트 단어를 떠올리며 사회적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은 인종, 장애인, 성소수자, 노인과 어린이들에게도 그러하진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자.


나는 여자아이이고 싶었을까? 내가 남자아이였다면 세상 살기가 더 수월했을까? 과거 여성운동가들의 희생을 발판삼아 현재 여성인권이 성장 과도기를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디 멀지 않은 미래에는 "어떤 남자가 페미니스트를 견디겠는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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