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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May 14. 2023

회색 인간



 


이곳에서 예술은 필요가 없었다. 인간이란 존재가 밑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인간들에게 있어 예술은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다. 지칠 대로 지친 이곳의 회색 인간들에겐 땅을 팔 수 있는 회색 몸뚱이만이 가진 전부였고, 남들도 다 그래야만 했다. - p.15


대도시 사람들이 땅속 세계 지저인들에게 납치돼서 노동을 한다. 사람들은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은 분노와 절망으로 바뀌고 극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특유의 이기심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마치 회색이 된 듯 했다. 그것이  흩날리는  돌가루  때문인지, 암울한  현실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무표정한  회색  얼굴로  하루하루를  억지로  살아가고  있다. 일하는 사람들 중에서 어느 날부턴가 노래를 부르는 여인이 나타난다. 땅을 파기에도 모자랄 그 힘으로, 그런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다니.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도 당연했다. 분노한 사람들은 여인을 마구 때린다. 몸을 가누지 못해 바닥에 주저앉아 굶어 죽어가던 그 여인은 또다시 노래를 부른다. 이후부터 사람들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그날부터 회색이 아니었다.  


김동식 작가의 <회색인간>은 인간이 밑바닥까지 추락할 때 현실에서는 어떻게 대응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짧은 소설 24편을 묶은 소설집 안에 가상현실, 인조인간, 영생 등 새로운 세계를 담았다. 익숙한 소재들에 대한 예측을 완전히 배신하며, 기묘한 상황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지저 세계로의 납치, 사람을 집어삼키는 빌딩, 피로를 풀어주는 정화수 등 비일상적 상황에 부딪힌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디스토피아적 세계는 현실에 대한 은유로 읽히며 한참을 곱씹게 만든다.  


우리는 매일 무표정한  회색  얼굴을 접하고 있다. 사무실에서, 휴대전화  속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회색  얼굴이  걸어가고, 회색  얼굴과  살아간다. 누군가의  눈에는  나  또한  하루하루를  억지로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지칠 대로  지친  이곳의  회색  인간들에겐  땅을 팔 수  있는  회색  몸뚱이만이  가진  전부였고, 남들도  다  그래야만  했다. 인간을 사용 가능한 인력으로 보는 현실을 꼬집은 내용이다.


소설 속 지저세계 노동자들은 누구도  서로를  돌봐주지  않는다. 부상을  당한  자에게  빵을  나누지  않는다. 쓰러지면  그걸로  끝이었다. 더 이상 노동을 하지 못하는, 활용 가치를 다한 인간은 가차 없이 버려진다. 우리는  다른가? 쓰러진  사람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가? 제도가 튼실하게  마련되지  않았다면, 적어도  우리는  실패한  주변 사람에게 좌절한 이웃에게  따뜻하게  손을  내밀 인간성을 가졌는가?  

문화도  교육도  경제적  가치로  치환되는  시대이다. 너무나도 치열하게 쓸모를 따지고 있다. 소설에서 쓸모없는 노래나 부르는 여인은 없어져야 할 대상으로 낙인찍힌다. 심지어 사람들 손으로 직접 여인을 없애버린다. 과연 누가 회색인간인지 되묻게 된다.


김동식 작가는 “지금껏 없던 소설”을 쓰는 작가라는 평을 듣는다. 제도권에 있지 않는 그의 이력에 상당히 끌린다. 작가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곧바로 10년 넘게 주물 공장에서 노동하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소설을 썼다. 글 쓰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어 초반 게시글을 보면 맞춤법과 상황 설명에 오류가 많다. 작가는 게시판 댓글에 달린 피드백으로 하나씩 오류를 바로잡으며 성장했다. 댓글로 여러 사람이 의견을 주고받으며 토론하다보면 결국 가장 나은 방향으로 흐른다. 마지막까지 '좋아요'가 가장 많이 달린 댓글을 따르는 식으로 작가는 독자 의견을 적극 수렴했다. 그렇게 현장에서 스스로 글 쓰는 법을 익혀갔다.  


작가의 생산력이 놀랍다. '오늘의 유머' 게시판에 단편을 하나 올리고, 이틀 뒤에 또 새로운 단편을 올리고, 그렇게 2년 동안 150편의 이야기를 올린 셈이다. 완성도 역시 뛰어나다. 김동식 소설집은 그렇게 써내려간 300편의 짧은 소설 가운데 66편을 추려 묶은 것이다. 갑자기 펼쳐지는 기묘한 상황, 그에 대응하는 인간들의 행태는 우리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며 이야기에 빠져들게 한다. 농담처럼 가볍게 읽히지만, 한참을 곱씹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작품들이다.


김동식 작가의 소설에는 유독 인간을 계급으로 나누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소설 밖 현실에서 인간을 계급으로 나누고 갑질을 하는 일이 많은데, 작가는 그 세태를 그대로 소설에 녹여낸다. 누구나 사람을 계급으로 나누는 것에 대한 분노와 화가 있고 잘못된 거라는 걸 알면서도 동시에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안다. 깊이 공감하고 이해하기에 더 사실적으로 읽힌다. 웃고 즐기는 사이 인간다움과 인간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정상, 비정상의 경계가 모호한 지금. 정상이 비정상인 거 같고, 비정상이 정상인 것 같은 상황들이 심심찮게 벌어지는 요상한 사회 속에 살고 있다. 해답지 같은 책이 아닌 질문지 같은 책을 써 내는 작가의 소설이 더욱 반가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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