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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Jun 24. 2023

태어난 아이





'태어나고 싶지 않아서 태어나지 않았던 아이'가 있다. 날마다 우주의 별 사이를 걸어 다닌다. 별에 부딪혀 아프지도, 태양 가까이에서 뜨겁지도 않았다.  태어나지 않았기에 아무 느낌이 없고, 어떤 일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어느 날 아이가 지구에 온다. 배고픔도 시끄러움도 못 느낀다. 심지어 개한테 물린 상처도 상관없다. 사자가 으르렁거려도 무섭지 않고, 모기가 물어도 가렵지 않다. 분명 사람이 맞는데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  


그러다 다른 아이가 개에 물려 울면서 엄마를 찾아 뛰어가는 모습을 보고 흥미를 느낀다. 따라가 보았더니 엄마는 아이를 달래주고, 엉덩이에 반창고를 붙여준다. 그때,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처음으로 태어나고 싶어진다. 고작 반창고를 붙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태어나서 처음 한 말은 “엄마, 아파!”이다. 그 장면에서 아이는 처음 옷을 입는다. 태초의 자유로운 모습으로 별나라를 누비고 다닐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엄마, 아파!" 태어난 아이는 팔과 다리가 아파서 울었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엄마가 달려와서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아 주었습니다. 엄마는 태어난 아이를 깨끗이 씻기고, 약을 바른 다음 팔에 반창고를 딱 붙여 주었습니다. "야호!" 태어난 아이는 엄마한테 안겼습니다. 부드럽고 좋은 엄마 냄새! - 사노 요코 <태어난 아이> 중에서


아이가 태어나고 싶어진 것은 세상에 나와 거창한 성공을 이루고 싶어서가 아니다. 즐길거리 다양한 이 세상에서 한바탕 신나게 놀고 싶어서도 아니다. 누군가 나를 따뜻하게 안아 위로해 주고, 생채기가 난 자리에 반창고를 붙여 주기를 원해서 태어난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마침내 ‘태어난 아이’가 되었을 때, 드디어 상처에 눈물이 나고, 배가 고프고, 물고기를 잡으러 가고, 피곤하면 졸음이 쏟아지는 진짜 삶을 살게 된다.  


사노 요코 작가는 이 책에서 삶과 행복을 연관 짓지 않는다. 삶의 목표가 반드시 행복일 필요는 없으니까.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 채 세상을 방관자 시선으로 사는 것은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태도이다. 마치 우리가 소파에 앉아 TV속 광고를 멍하게 바라보는 태도와 비슷하다. 비가 온들 남이야 젖든 말든 관심 없고 나만 뽀송하면 그만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사이에서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다. 기꺼이 빗속에 뛰어들어 비를 맞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함께 춤을 추는 진짜 삶 속으로 풍덩 뛰어들 때 우리는 ‘태어난 아이’가 된다.


반창고에 홀딱 반해 '태어난 아이'는 이 세계가 아름답다거나 삶은 행복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태어나는 건 피곤한 일이야.”라고 말한다. 아프고, 배고프고, 가렵고, 때로 깔깔 웃고, 자랑도 하고, 실컷 놀면 피곤해지는 그런 아이의 삶은 지극히 평범하고 현실적이다. 그림책에 표현된 무수히 많은 선처럼 나와 세계는 수많은 접점을 가지고 있는데, 때로는 뚜렷한 대비를 이루기도 하고 팽팽한 긴장을 이루기도 한다. 이 자극을 마냥 스트레스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나와 세상이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으로 생각해보자. 그것이 바로 삶이 아닐까.   


사노 요코 작가는 '태어난다'는 의미에 대해 물리적으로 태어난 것과는 별개의 관점을 제시한다. 아이가 스스로 깨어나, 태어나고 싶게 만드는 요소들을 툭툭 던진다. 반창고가 등장하고, 엄마가 등장한다. 작가는 스스로 가진 선택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그렇게 선택의 연속이며, 태어나는 것부터 선택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수많은 욕구와 번잡한 상황과 고난이 닥치는 삶은 온전히 네의 것이니 그 모든 것에  상관하고 싶어질 때 태어나는 것을 선택하라고 묵직한 메시지를 전한다.


이 책은 모두 네 가지 색으로 그려졌다. 첫 장과 마지막 장에 노랑, 파랑이 쓰였고, 가운데 장은 빨강과 초록만을 사용한다. 파랑은 고요함, 노랑은 따뜻함과 호기심을, 빨강은 정열과 치유를, 초록은 활기와 편안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고요한 우주를 유영하던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따뜻함에 대한 어떤 호기심으로 지구에 내려와 다양한 세상의 자극을 경험하면서 활기찬 감각의 세계를 맞이하게 되는 셈이다.


빨강과 초록의 세계 에서 아픔과 배고픔, 위로를 한껏 느낀 아이는 마지막 장에서 다시 안전하고 편안한 파랑과 노랑의 세계로 돌아간다. 마치 우주를 유영할 때처럼. 그러나 반창고는 그대로 붙인 채로. 태어나기 전, 무뚝뚝하고 불만투성이였던 아이의 표정은 어느새 한없이 평화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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