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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Jul 30. 2023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명품에 큰 욕심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그 돈으로 명품 가방을 사느니 집값에 보태야겠다는 현실적인 생각이 고개를 내밀어 선뜻 살 수가 없다. 하지만 무엇이 좋은 물건인지는 안다. 평소에 내가 드는 가방은 조악한 싸구려일지라도 눈앞에 보이는 반짝이는 명품의 브랜드와 가치는 알아본다. 그중 하나가 이브 생 로랑. 특유의 이니셜 로고만 봐도 어떤 브랜드인지 곧바로 연상된다.  


이브 생 로랑이라고 하면 프랑스와 패션, 그리고 동성 연인이 자동 연상된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브 생 로랑의 연인이자 사업파트너였던 피에르 베르제가 연인이 죽고 나서 쓴 편지들을 모은 책,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를 보면 그의 인생은 대중에게 알려진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책은 이브 생 로랑의 장례식장에서 피에르 베르제가 낭독한 추도문으로 시작한다. 50년에 걸친 절절한 사랑과 존경을 담은 그의 편지는 6개월 뒤 크리스마스에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방식으로 다시 시작된다. 이브 생 로랑과 함께 수집했으나 이제는 오롯이 자신에게 남겨진 수많은 예술 작품과 집을 처분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이 이룬 것과 실패한 것을, 사랑의 눈부심과 지난한 고통의 시기를 담담히 드러낸다.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 순간에는 수많은 사회적 수식어를 떼어낸, 단지 오랜 연인을 잃은 뒤 빈집에 남은 한 남자를 발견하게 된다. 


퐁피두 센터에서 고별 패션쇼가 열렸던 그날 넌 모든 것을 잃었지. 무대 위의 작품을 바라보며 안녕을 고한 거야. 마치 단두대에 오르는 사람처럼 런웨이에 오르던 너의 모습이 기억나. - p.45 


1958년, 이브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처음 만난다. 이브 생 로랑은 막 디오르의 수석 디자이너로서 세상에 얼굴을 알린 참이었고, 27세의 피에르 베르제는 구상 회화의 왕자로 불리던 화가 베르나르 뷔페와 7년간 연애를 이어오고 있었다. 단번에 사랑에 빠진 둘은 이후 1961년 함께 패션 회사를 설립하고 피에르 베르제가 경영을 맡게 되면서 강력한 결속력을 갖는다. 이들의 관계는 공과 사를 구분하기 어려웠는데 흥미로운 점은 그러한 관계가 평생 지속되었다는 사실이다. 패션계에서 첫손에 꼽히는 샤넬의 경영자 자리를 제안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브 생 로랑을 위해 일고의 여지없이 거절하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피에르 베르제의 많은 부분은 연인에 의해, 혹은 연인을 위해 결정되었다.  


피에르 베르제는 한 인터뷰에서 “이 책은 나의 방식으로 쓴 이브 생 로랑의 전기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말대로, 이 책을 읽고 있으면 피에르 베르제의 눈으로 바라본 이브 생 로랑의 모습이 생생히 그려진다. 수줍고 영리한 소년이기도, 때때로 구제불능의 알코올중독자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엄격한 완벽주의자인 동시에 패션을 미적 영역에서 사회적 영역으로 확장시킨 혁신적인 패션 디자이너의 모습이 부각된다. 


이브 생 로랑은 기성복을 도입한 최초의 디자이너로 알려져 있다. 계층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신의 옷을 입고 즐기길 바랐던 이브 생 로랑의 자유로운 생각은 당시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패션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1966년에는 남성의 턱시도 정장을 여성복에 도입하여 최초의 여성용 바지 정장을 만드는 등, 여성 복식사의 큰 획을 긋기도 한다. 그저 아름다운 의복이라는 한정된 범주에서 사회적 맥락으로 패션의 의미를 확장시킨 이브 생 로랑의 혁신성이 구현되는 것을, 피에르 베르제는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적극적인 방식으로 지켜본다.  


패션 외에는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던 이브 생 로랑이 패션에 관한 일 말고는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그의 곁에서 발로 뛰며 곁을 지킨 인물이 다름 아닌 피에르 베르제였다. 이는 그가 본래 지니고 있었던 예술에 대한 존경심, 이브 생 로랑의 천재성에 대한 확신이 뒷받침된 행보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천재의 이면에 드리운 어둠들까지도 끌어안게 한 강력한 원동력은 연인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화려하고 굴곡진 삶의 여정 너머에서 고요히 생이라는 연극의 막을 내리고 무대를 정리하는 한 남자를 통해, 우리는 완결되었으되 완벽하지는 않은 사랑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것이 생의 본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피에르 베르제가 연인을 '너의 명민함, 너의 다정함, 너의 부드러움, 너의 힘, 너의 용기, 너의 아름다움, 너의 고집과 욕구' 그렇게 불렀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그렇게 살아보기를 다짐해 본다. 그래서 어쩐지 힘이 빠질 때, 나의 이브 생 로랑을 펼치고, 소리 내 읽곤 한다. 너의 명민함, 너의 용기,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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