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끌로이 Jan 02. 2024

혼자여서 좋은 직업



 


본편보다 재미있는 역자 후기가 있다. 소설은 아리송한데 후기가 흥미진진해서 굳이 찾아 읽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일본 문학 애호가라면 모를 수 없는 이름, 번역가 권남희다.  


1999년 첫사랑의 열병을 남기며 수백만 관객을 동원했던 이와이 순지의 감성 멜로영화 〈러브레터〉를 기억한다. 2013년 14년 만에 한국에서 재개봉을 하게 됐다. 영화 재개봉에 맞춰 절판됐던 소설도 다시 출간됐다. 한국에 영화감독으로 알려져 있는 이와이 순지는 실제 소설가이기도 하다. 이 작품도 소설 <러브레터>를 월간지에 연재하던 것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소설과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번역가 권남희의 이름도 유명해졌다. 이때 이후로 번역가 권남희를 확실히 기억하게 됐다.    


타국에서 쓰인 명작의 언어를 한국으로 들여와 한국의 언어로 바꾸는 마법사 역할을 하는 그도 가끔씩은 역자가 아닌 작가로 책을 낸다.  <혼자여서 좋은 직업>은 프리랜서 번역가의 애환이 담긴 일상 에세이다. 지독한 자기연민이나 자아도취 없이 먹고사는 이야기를 담백하게 풀어낸다. 인세계약과 매절계약 차이를 설명하면서 30년째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그대로인 가정경제 상황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시장 물가는 이렇게 오르는데 번역료는 왜 그대로냐고 따져묻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한 가지를 계속하는 이유는 번역에 대한 진심 때문이다. 외국어 좋아하고 글쓰기 즐기는 유일한 재주를 하늘에서 내려준 동아줄인 양 꼭 붙잡고 놓지 않아 30년째 번역을 하고 있다. 2000년대 무라카미 하루키를 시작으로 일본 문학이 범람하던 시기부터 활동했다. 초장기에는 직접 일본에 건너가 헌책방을 다니면서 어떤 책이 한국에서 읽힐지를 가려내 출판사에 먼저 제안하는 패기도 있었다.  


맹지를 비옥하게 일구는 농부의 심정으로 일본 책들을 한국에 소개한 덕분에 지은이 이름 옆에 나란히 놓인 옮긴이 이름 석 자는 일본 문학 애호가들에게 오랜 친구 같은 이름이다.  권남희 작가는 번역가라는 직업에 대해 “큰돈 벌긴 어렵지만 경력이 책이 되어 쌓이는 좋은 직업”이라 말한다.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인 만큼 일본 문학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인데, 무라카미 하루키, 마스다 미리 등 오랜 시간 함께 작업한 작가들에 대해서는 격하게 공감하며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역할에 따라 평소 생활이 달라진다는 배우들처럼, 번역하는 작품에 따라 이성적이 됐다가 감성적이 되기도 한다고 말하며, 작가들의 성향에 따라 마음가짐이 달라진다고 고백한다. 오가와 이토 대담회에서 팬을 만나 함께 울었던 에피소드, 번역가가 되고 싶다고 이메일을 보낸 고등학생 독자들에게 쓴 답장은 미소를 머금게 한다.  


노모와 작가, 딸 3대가 함께하는 일상은 소소하며 왁자지껄하고, 평범하면서 특별하다. 노모에게서는 인정받고 싶은 딸이면서, 동시에 딸을 둔 엄마이기도 한 작가는 이들의 관계에서 한 편의 시트콤 같은 즐거운 일상을 펼쳐 보인다. 역자 후기에 등장하던 딸 정하는 어느덧 커서 엄마에게 예리한 피드백을 해주고, 취업을 해서 고급 음식점에서 식사를 대접하기도 한다. 책을 쓰고 나서 가장 큰 욕심은 딸에게 인정받는 것이라는 작가의 딸바보 면모가 웃음과 찡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번역가 권남희는 지난 30여 년 동안 300여 권의 책을 번역했다. 집 밖에 나가지 않고 모니터만 들여다본 시간이지만, 그는 그 300개의 세계를 살아냈다. 고요하고 치열하게 한 세계를 다른 세계로 옮겼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작가의 사생활을 알게 된 독자라면 마음속으로 그의 작품들을 헤아려보고 여러 가지 추측을 해보기 마련이다. 작품 성향이나 배경, 인물들의 캐릭터 등등을 이리저리 조합하면서 마치 퍼즐을 맞추듯 완성해가는 과정을 즐기게 된다. 권남희 작가는 목욕탕집 딸이었다. 호텔을 운영하는 부모님의 일을 도왔다던 사쿠라기 시노에게서 작가는 동질감과 반가움, 흥분으로 뒤섞인 감정을 느꼈다고 말한다. 혼자만의 은밀한 상상놀이를 하면서 작가와 작품을 분석하는 일은 번역가만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권남희 번역가는 이런 특권을 남용하지도 악용하지도 않는다. 그저 사려 깊고 성실하게 옮길 뿐이다. 그래서 원서의 감동이 한글을 통해 진솔하게 전해진다. 번역이 좋아 번역을 했던 그는 이제 창작자로도 이름을 날린다. 에세이에 이어 소설로 영역을 확장할 예정이라고 한다. 언제나 잘 읽히고 오랜 여운을 남기는 그의 문장력을 곧 소설에서도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나는 앞으로 더 행복하게 번역하고 더 즐겁게 글을 쓸 것이다. ……라고 하니, 뭔가 비장한 각오라도 하는 것 같지만, 지금까지와 다름없이 살아가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방학 숙제 다 해놓고 기다리는 개학처럼 남은 인생은 왠지 설렌다. - p. 216 
매거진의 이전글 전쟁 같은 맛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