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마다 끄집어내 읽는 글이 있다. 열 쪽밖에 안 되는데, 읽고 나면 대하드라마를 본 듯 아득해지는 소설이다. 이상(1910~1937)의 <봉별기(逢別記)>. 제목을 풀어 보면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다. 인간사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피할 수 없으니, 인연의 기록은 결국 다 ‘봉별기’다.
1936년, 이상이 죽기 바로 전 해에 발표한 작품이다. 23세 3개월인 이상은 폐병 요양차 황해도 배천온천으로 가서 기생 금홍을 만난다. 금홍을 서울로 불러 청진동에 다방 ‘제비’를 차리고 마담으로 앉혔다. 2년 뒤 결별하기까지 이상은 금홍과 동거한다. 이별과 동거를 거듭하면서 끝내는 다시 “작부가 된 그녀와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놀다가 영원히 헤어지기로 서로 합의를 본다”는 그의 첫 아내 금홍과의 생활경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상의 글들만큼 재미난 글들이 또 있을까? 무엇보다도 리드미컬하다. 또 날이 서있다. 읽는 재미로만 본다면 자전적 소설인 <봉별기>가 최고다. “스물세 살이요―삼월이요―각혈이다.” 시절과 주인공의 신상이 짧고 강렬하게 드러나는 첫 문장이다. 멋들어진 3박자의 인트로는 암울하고 비장하기까지 한 각혈을 한결 가볍게 만든다.
이상은 금홍에게 첫눈에 마음을 빼앗겼으면서도 친구에게 금홍과 사귀라고 권하는 등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한다. 결국 금홍을 아내로 맞아 세상에도 없이 현란하고 아기자기한 신혼을 보내지만, 자유로운 영혼인 금홍에게 예전 생활에 대한 향수가 찾아온다. 그녀는 다른 남자들을 만나거나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가출을 일삼는다.
하루 나는 제목 없이 금홍이에게 몹시 얻어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나가서 사흘을 들어오지 못했다. 너무도 금홍이가 무서웠다. 나흘 만에 와 보니까 금홍이는 때 묻은 버선을 윗목에다 벗어 놓고 나가 버린 뒤였다. - p.122
금홍이 너무도 무서웠다는 대목에서 피식 웃음이 터진다. 그들은 사랑하면서 미워하고, 도망가면서 그리워한다. 기괴한 사랑이다. 이상이 금홍과 술상을 마주하고 재회하는 마지막 장면은 몇 번을 읽어도 생경하다.
“밤은 이미 깊었고 우리 이야기는 이게 이 생에서의 영이별(永離別)이라는 결론으로 밀려갔다.”고 표현한다. 살아있는 채로 영이별을 하는 연인들이라니 이토록 절절한 이별이 어디 있을까. 금홍은 은수저로 소반을 두드리며 창가를 한 곡조 뽑는다.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장에 불 질러 버려라.” 당신이 나를 속여도, 내가 당신을 속여도. 꿈결이라고 노래한다.
이 구절을 읽으면 마음이 아프다. 당신 인생에서 가장 높이 찬란했던 순간은 언제냐고 말을 걸어주는 것만 같다. 그리고 당신은 지금 무엇을 꿈꾸냐고 물어보는 것 같다. 이상은 볕 좋은 춘삼월 식민지 상태의 온천지에서 망명을 꿈꾸었다. 결국 사라질 줄 알면서도 끝내 삶을 사랑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하고 인생이라는 꿈같은 시간에 깜빡 속은 기분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조선총독부 건축기사, 모던보이, 화가, 시인, 소설가, 요절한 천재. 난해한 작품세계로 유명한 이상은 괴이한 행동으로 한국 문학사의 이단아 취급을 받는다. 이상은 몸단장에 소홀해 머리는 늘 수세미처럼 엉켜있고 여름이나 겨울이나 같은 옷만 입는 단벌신사로 알려진다. 한글을 하룻밤 만에 익히고 그림에도 소질이 있어 어려서부터 무엇이든 똑같이 그려내는 능력을 지녔던 이상의 삶은 가난과 병마로 얼룩진 삶이었다.
이상의 사인 역시 아직까지 논란거리이다. 일본 동경에서 사망할 당시 공식적인 사인은 폐결핵이지만 동경에서 함께 유학했던 시인 김소운에 의하면 사망 진단서에 '결핵성 뇌 매독'으로 적혀있었다고 한다. 언제 누구에게 감염된 것인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사망 후 누군가 그의 하숙방에서 원고 뭉치들과 그림을 손수레로 끌고 나왔다고 전해지지만 현재 그 행방은 묘연하다. 이처럼 굴곡진 삶을 살며 숱한 의문을 남긴 이상이 연말이 되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좋은 소설은 겪지 못한 인생을 살아보게 한다. 다 읽은 후 고치처럼 몸을 말고 웅크리게 만든다. 마치 상처 받은 것처럼. 이야기가 몸에 상처를 내고 들어와 나를 재구성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결핵으로 죽음을 눈앞에 둔 젊은 작가의 두려움과 고통과 체념이 절절하게 그려져서인지 이상의 소설을 읽고 나면 묵은 미련을 떨치고 내년을 살아낼 힘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