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부엌은 내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by 끌로이
부엌.jpg



“전 세계를 요리하겠다”는 각오로 4년동안 195개 나라의 음식을 195주 동안 꼬박꼬박 요리한 여자가 있다. 만든 음식 가짓수만 650가지가 넘는다. 그 여정은 그녀의 블로그 ‘글로벌 테이블어드벤처’ (http://globaltableadventure.com)에 기록해나갔다. 인종과 나이, 지역을 초월해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도전을 응원했고, 그 기록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했다.


<부엌은 내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사진)는 미국 CIA요리학교 출신의 푸드 칼럼니스트 사샤마틴의 세계 음식 기행을 담고 있다. 처음에는 오클라호마 주 털사의 조그만 부엌에서 전 세계 요리를 하며보낸 4년 동안의 이야기를 발랄하게 소개하는 책을 기획했었다. 음식을만들다가 그 음식을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고, 기억을 따라가다 보니 애써 꽁꽁 묻어두었던 아픈 추억이 부상했다.


사샤 마틴의 오른손 두 손가락에는 지문이 없다. 어린 시절 엄마가 햄버거를 만들다 잠깐 등을 돌린사이 뜨거운 그릴을 만졌기 때문이다. 부엌은 어느 집에나 있는 평범한 공간이다. 하지만 사샤네 가족에게 부엌은 삶의 전부이기에 더욱 특별했다. 치안이 좋지 않은 허름한 동네의단칸방에서 홀로 남매를 키운 엄마의 부엌은 음식을 만들어 먹는 공간 이상이었다. 가족들은 그곳에서 잠을 자고,이야기를 나누고, 밥을 먹었다. 엄마가 요리를대하는 태도가 곧 삶을 대하는 태도였다. 한 방울도 낭비할 수 없는 삶, 이리저리 싹싹 긁고 쥐어 짜낸 삶이었다. 이웃집 과수원에서 주운 상처난 사과로 만든 파이가생일케이크의 전부였지만 사샤네 가족은 행복했다. 적어도 그렇게 셋이 살 때까지는 행복했다.


엄마의 남자친구가 사샤네 집을 몰래 팔아 도망간 이후부엌이 전부인 삶은 끝났다. 남매는 위탁가정을 전전하면서 불안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 불안감과 그리움, 분노, 상실은 사샤가 성장해 가정을 이룬 후에도 집요하게 쫓아다녔다. 그럴 때마다 사샤는 요리를 했다. 그렇게 해야 엄마의 행복했던 부엌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삶의 허기가 음식에 대한 집착으로 변했다.


스트레스 받을 때 나도 모르게 폭식하게 되고, 헛헛한 마음을 달디 단 초코케이크로 위로하듯이 때때로음식은 아주 훌륭한 극약처방이 되기도 한다. 가장 빠르고 손쉽게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맛있는 음식을 먹는것이지만 빠른 대신 효과도 금세 사라진다. 말 그대로 임시방편일 뿐이다. 사샤는 엄마에 대한 집착, 어린 시절 결핍에 대한 기억을 떨치고자 잠시 요리를 내려놓는다.지금까지 경험한 많은 종류의 음식들, 또 아직 가보지 않은 나라의 다양한 맛을 탐험하기로결심했다.


그녀의 블로그에는 김치 만드는 법이 소개돼 있다. 외국 사람들이 한국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음식이기도 하지만, 선호도가 극명하게 갈리는 음식이기도 하다. 김치를설명하면서 사샤는 “소금에 절인 생선, 새우젓갈, 매운 맛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마음을 열고 즐기면 발효 김치의 세계에 완전히젖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포기 김치를 몇 시간씩 소금에절여 독에 넣고 발효시키는 정통방식 대신 한입크기로 잘라 버무리는 간편한 방식을 택했다. 김치를 보다 많은사람들이 대중적으로 즐기기를 바라는 사샤의 진심을 엿볼 수 있다.


아프가니스턴의 ‘카벨리 팔라우’, 앙골라의 ‘무암바 드 갈리냐’ 같은 이색 요리 또한 흥미롭다.워낙 생소해서 요리해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식재료를 두고 사샤는 언제는 언제나 유쾌하다. 인생은 짧으니 지금부터라도 자신을 내려놓고 세계 음식에 도전하라는 식이다.


부엌마다 비밀과 추억이 숨겨져 있다. 사샤에게 부엌은 한때 삶의 전부였다가 도피처였다가이제는 스스로를 마주보는 맑은 거울이다. 어느 삶이나 완벽하지 않다. 단듯하다가 쓰고, 맵고 짠 일상이 연속되기도 한다. 인생을흔히 음식에 비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양념이 뜨거운 냄비와 부딪치는 순간, 모든 것이 판가름 난다. 그것이 입에 침이 고이게 만드는 향기를 풍기며 지글거릴 것인지 아니면재로 변해버릴 것인지. 예전에는 행복이 지글거리는 냄비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다. 행복은 양념이다. 언제나 환경의 영향을받고 불의 힘을 빌려야 하는 섬세한 양념이다. 행복이라는 양념이 불 위에서 어떤 맛을 낼지는 내가 어떤 태도로삶을 마주하느냐에 달려있지 않을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