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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승은 Jul 06. 2017

테니스, 그 질긴 인연 ㉘

신토불이 사나이의 테니스 레슨 인 하와이 

매사에 우선순위라는 것이 있다. 어린아이 둘을 외국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바로 '친구 사귀기'였다. 나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 영어는 대충 가능했을지 몰라도 낯선 곳에서 의지할 수 있는 벗을 만드는 것이 항상 힘들었다. 그래서 늘 외로웠다. 그런 이유로 영어를 유창하게 뽑아내는 아이보다는 어디를 데려다 놔도 쭈뼛쭈뼛하지 않고 광속으로 친구를 사귀고 바로 자기만의 판을 벌릴 수 있는 아이로 만들고 싶었다. 친구 사귀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하와이에 오니 아이들이 국적과 상관없이 여러 친구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솔직히 영어야 한국 가서 배워도 되는 것이고, 하와이 구경도 기회는 충분하니깐 나에게는 이 동네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 제일 중요했고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어디서나 스스로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아이들은 친구도 쉽게 만들 수 있고 그 과정 속에서 사람 보는 눈도 키워지고 갈등에서 타협점을 찾을 수 있게 된다고 믿고 있다. 




어떻게 하면 하와이에 사는 친구들을 왕창 만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분명 교실에 앉아서 노는 것은 한계가 있을 터인데 땀을 흘리며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하와이에서 만나는 아이 엄마들 마다 이 고민을 털어놨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를 하와이로 인도하신 마담 M이 테니스 레슨을 권유했을 때 내 심장은 덜컹 내려앉았다. 머리 안 감고 나간 날 횡단보도에서 옛 남자 친구와 마주친 느낌이랄까. 왜 하필이면 많고 많은 스포츠 중에 테니스냐. 한국에서 징하게 미워하고 왔건만 테니스 너를 또 만나야 하다니. 참으로 질기고 지겨운 인연이었다.



사실 한국에서 오기 전까지 테니스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테니스를 사랑하시는 남편은 퇴근 후 테니스 클럽으로 출근 도장을 찍으셨는데 나는 그것 때문에 매번 입이 나왔다. 남편의 운동을 이유 없이 반대하는 속 좁은 여편네라서가 아니라 테니스 동호인들의 징한 매니아적 기질 때문에 바람이 나도 이렇게는 안 나겠다며 바가지를 긁었던 참이었다. 그런 내가 남편에게 전화를 해야 했다.  


“여보, 내가 한국에서 테니스 피해서 왔는데... 이 동네에서 애들이 모여서 할 게 없어. 어쩔 수 없이 테니스 시켜야 하나 봐.”


테니스를 증오하는 마누라가 아들을 데리고 테니스 레슨을 찾아갔다는 소식에 스마트폰 속에 남편의 표정은 흐뭇함을 너머 천상의 미소를 보였다. 그동안 구박받고 억압되었던 테니스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외치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인가, 나의 의도는 아이들끼리 모여서 뛰어 놀라고 보낸 테니스였는데 신토불이 사나이는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반복적인 스윙 연습이 지루할 법도 한데 너무 심각했다. 두 번째 레슨이 끝난 후 코치님이 나를 살짝 부르시더니 한국에서 테니스를 배우고 왔냐고 물으셨다. 기가 막혀서 너털웃음이 나왔다. 나는 우리 집에서 테니스의 ‘테’ 자만 나와도 밥상을 뒤집을 판이라며 테니스에 뺏긴 남편 흉을 봐댔다. 


영어를 배우는 집단 안에서는 영어에 전전긍긍하지만 이미 영어가 일반적인 집단에 들어오면 영어 외에 자신이 돋보일 수 있는 무기가 있어야 한다. 신토불이 사나이는 어학적인 재능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한 발 양보할 줄 아는 아이 었고 배움에 있어서 진중한 아이 었다. 나는 아이의 착하지만 느린 성격 때문에 또래 집단에서 늘 손해만 보고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까 걱정을 했었다. 그러나 아이는 느리기 때문에 꼼꼼하게 배울 수 있었고 착하기 때문에 이미 형성된 또래 집단에서도 적응할 수 있었다. 아들 자랑 타임인가! 내가 아는 어르신은 자신의 아들은 똥도 버릴 게 없었다고 하시더구먼 나는 그 정도는 아니다 (누구의 똥이든 다 더럽다). 



여기 아이들에게 신토불이 사나이는 하와이에 막 떨어진 신참이었고 한 달 후면 사라질 의미 없는 존재였다. 애써 친해질 필요도 없는 한시적인 관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테니스장에서 만나면 신나게 놀았다. 까불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조용히 해내니 아이들도 차츰 마음의 문을 열어 주었다. 무엇보다 열심히 배웠고 코치님이 그 모습을 칭찬하자 모두에게 인정받게 되었다. 




오빠가 테니스를 배우는 동안 노란 메리야쓰 심심했다. 두 분이 동시에 테니스를 배우면 나도 좋겠지만 동생은 아직 나이가 어리다며 끼워주지 않았다. 이 분의 구성 성분은 80%는 하고잡이 근성과 20%의 오빠를 이겨 버리겠다는 승부욕인데 테니스 코치님이 그걸 파악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던 것 같다. 오빠가 재미있게 테니스를 배운다면 자신도 똑같이 테니스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오빠처럼 똑같이 재미있기라도 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덜 재미있는 건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테니스 레슨이 있는 시간에는 근처 놀이터에서 보초를 서야 했다. 놀이터에는 항상 동네 아이들이 나와 있었지만 노란 메리야쓰가 그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 위해서는 엄마의 도움이 필요했다. 엄마는 쉴 틈이 없다. 


뭐든 해봐야 느는 것이다. 나 역시 처음에는 노란 메리야쓰 마찬가지로 놀이터에 나온 아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어려웠다. 그런데 한 번 말 붙여 보니 하와이 놀이터에서 만난 아이들은 정말 학원이나 학습지에 쩔지 않은 순도 100프로 아이들이었다. 놀이터에서 계속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 어떤 아이랑 잘 놀 수 있겠다 정도는 그냥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친구를 찾는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다가 놀 수 있을 친구를 찾으면 얼른 친한 척을 하고 친구가 됐다. 



아이들이 함께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노란 메리야쓰 본인보다 어린 아이들하고 놀게 되면 노는 내내 "컴온, 컴온!" 하고 우르르 뛰어갔다가 또 “컴온, 컴온" 하면 반대쪽으로 뛰어가는 PE(체육수업) 수준의 놀이를 하고 있었다. 반면에 나이가 한 살이라도 많은 언니를 만나면 세상에 좋아도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날도 늘 그렇듯이 오빠가 테니스 레슨을 하는 동안 놀이터에서 놀 생각이었다. 그런데 열 명은 족히 될 것 같은 동네 큰 형아들이 오디오를 들고 아이들 놀이터를 장악하고 춤 연습을 하고 있었다. 어느 동네나 그맘때는 저렇게 어울리는 것이 즐거운 때인가 보다. 미끄럼틀과 몽키짐을 뺏긴 노란 메리야쓰와 나는 나무 아래에서 간식이나 먹으면서 저 형아들이 언제나 집에 갈까 지켜보고 있었다. 



나의 heaven, Heaven


그때 Heaven이 나타났다. Heaven은 일곱 살, Heaven과 함께 놀고 있던 동네 친구는 여덟 살이었다. 어디나 일곱 살 여자 아이는 밝고 수다스럽다. Heaven은 노란 메리야쓰에게 말을 걸고 거침없이 데리고 놀기 시작했다. 이름도 Heaven이라니 맘에 들었다. 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감동 그 자체였다. 매 번 어린아이들과 그놈의 "컴온 컴온"만 하고 뛰어놀았는데 이 언니는 나뭇잎을 따면서 ”Let’s play bank,“란다. 나는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은행 단어들을 확인했다. teller, ATM, savings account, deposit, take out 등 완전히 Learning mate였다. 친절하기는 또 어찌나 친절한지 동네 언니도 이렇게 착한 언니는 본 적이 없었다. Heaven 덕분에 나는 heaven을 경험했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조용히 커피를 한잔할 수 있었다. 헤어지며 Heaven과 친구에게 인사를 건넸다. 


"헤븐아오늘 만나서 즐거웠어우리 이번 주 목요일에 다시 오는데 그때 다시 은행 놀이 하자."



이건 Heaven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나의 heaven을 위한 흑심 가득한 제안이었다. 하와이에서 테니스는 나를 제외한 우리 가족 모두에게 기쁨을 선물했다. 신토불이 사나이는 하와이에서 놀 수 있는 친구들을 왕창 사귈 수 있었고 아빠로부터 물려받은 테니스 DNA를 확인했다. 노란 메리야쓰는 오빠의 테니스 레슨 시간 동안 동네 친구들과 놀 수 있었고 무엇보다 오빠 없이 엄마를 독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수혜자는 바다 건너 계신 분이었다. 테니스라면 도끼눈을 뜨던 마누라가 평생 테니스 동지를 손에 쥐어 줬으니 그분의 테니스 인생에 먹구름은 가고 해뜬날이 찾아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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