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라들을 위한 과일 리스트
바야흐로 1995년도,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어학연수라는 뜬구름 잡기가 붐이었고 나 역시 남들에게 뒤질세라 캐나다로 향했다. 부모님 그늘을 벗어나 첫 홀로서기였으며 서울 밖을 모르던 강남 촌년의 첫 타향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여러 가지 힘들었지만 그중에서도 삼시 세 끼를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세상 귀찮은 일이라는 것을 뼈 저리게 깨달았다. 일주일에 한 번 집 근처 세이프웨이(Safeway)까지 뚜벅뚜벅 걸어가 팔이 끊어져라 장을 봐서는 일주일을 버텼다. 어떤 날은 양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오다가 비를 만나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돌아오기도 했고 어떤 날은 무거운 짐을 들고 종아리까지 오는 눈을 헤치며 왔다. 그러던 어느 날, 믿었던 세이프웨이가 파업을 시작했다. 직원들이 모두 업장 밖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차도 없고 짐을 들어줄 남자 친구도 없었던 나에게 그나마 safe 한 way를 선사했던 세이프웨이가 그렇게 뒤통수를 쳤다. 그리고 20여 년이 흘렀다. 세월이 가도 한 결 같은 세이프웨이는 나의 탱탱했던 어린 시절을 소환했다. 홀로 외로이 낑낑거리며 장 보던 여학생은 이제 마트만 보면 날뛰는 아이 둘과 외롭지 않게 그러나 여전히 낑낑거리면 장을 본다는 사소한(?) 변화가 있을 뿐이었다. 탱탱했던 피부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겠다. 괜히 슬퍼지니깐.
[출처: 구글맵]
역시 따뜻한 곳에 오니 과일이 천국이구나! 그리고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마트에 진열된 과일의 종류가 참 제한적이다. 안타깝다. 우리 농수산물로 제철 과일만 먹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여러 가지 과일을 맛보려면 수입 농산물에 손을 안 댈 수가 없다. 세이프웨이는 그런 점에서는 훌륭한 곳이었다. 가격적인 면에서야 필리핀이나 태국 같은 동남아 나라들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하와이에 왔는데 이 많은 과일을 지나칠 수는 없지 않은가!
한국에서 손이 후덜덜해서 못 잡는 아보카도, 망고, 체리 그리고 여러 종류의 베리들(블루베리, 블랙베리, 스트로베리, 라즈베리)이 진열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 과일들도 유기농과 비유기농으로 나뉘어 있으며 유기농이라고 해서 우리나라처럼 가격이 비싸지 않다는 점이 놀라웠다. 아이들이 잘 먹는 자두, 복숭아, 살구, 체리를 담고 다른 것들은 맛을 보기 위해서 조금씩 담아 보기로 했다. 진열된 과일 옆에는 파운드당 가격이 붙어 있고 매대 중간중간에 저울(scale)이 있으므로 먼저 무게를 재어 본 후 구매할 수 있다. 알록달록 예쁜 과일들은 구경만 해도 즐겁다.
매일 새로운 과일을 시도하다 보니 한국에서 흔하게 먹었던 바나나, 파인애플, 오렌지의 차례는 오지도 않았으며 사과, 수박, 배 역시 먹어 볼 틈이 없었다. 하와이 과일들을 두루 섭렵하니 자연스럽게 몇 가지 과일로 추려졌다.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은 블루베리였는데 유기농이라고 해도 가격이 아주 만만했다. 블루베리 몇 팩을 사서는 집에 오자마자 한 팩은 뜯어서 먹고 나머지는 냉동실에 넣어뒀다. 그리고 비치에 나가거나 외출할 때 한 팩씩 들고나가면 어딜 가든 뒷좌석 파이터들을 조용히 시킬 수 있었다. 새콤한 것을 좋아하는 노란 메리야쓰는 블랙베리나 크랜베리도 시원하게 흡입했지만 신토불이 사나이와 나는 손도 못 댔다. 체리와 천도복숭아는 알도 굵고 달콤해서 항상 냉장고 서랍에 채워 놓고 아이들과 내가 시시때때로 집어 먹고살았던 것 같다.
한 번은 망고 앞에 서서 머릿속으로 한국의 망고 값과 비교를 하고 있었다. 필리핀에 가면 망고 한 봉지 가득에 1달러라는데 한국에만 오면 한 개에 몇 천 원짜리로 둔갑을 하니 내 어린 시절 바나나가 같은 존재인가. 게다가 망고를 잘라보면 3분의 1이 넓적한 씨인데 그 돈 주고 사 먹기는 정말 아까운 과일 중 하나였다. 하와이에서나 원 없이 먹어 보자며 마구 담았다. 그런데 옆에서 과일 고르던 하와이 아줌마가 쓰윽 오시더니 말을 건다.
“너 지금 망고 가격을 보고 사는 거니? 망고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싼 거야. 사지 마. ”
세계 어딜 가나 아줌마들의 오지랖은 유익하다. 아마도 관광객으로 추정되는 동양인 아줌마가 무식하게 망고를 쓸어 담고 있으니 오지랖의 이름으로 참을 수 없으셨던 것이다. 아줌마의 긴 설명을 요약해 보면 하와이에서 재배한 망고가 나오는 시즌에는 가격도 싸고 맛있지만 이 가격의 망고는 미국 본토에서 날아온 것이니 사지 말라는 것이다. 사려고 했었는데 옆에서 자꾸 비싼 거라고 강조하시니 나도 모르게 바구니에 담았던 아이들을 주섬주섬 다시 내려놓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 처음 보는 누군가의 호의는 참 유쾌하다. 알려줘서 고맙다며 친한 척하고 인사를 나눴다. 다시 말하지만 세계의 아줌마들은 오지랖으로 통한다.
아보카도 역시 한국에서 비싼 과일 중에 하나 아닌가. 하와이에는 이 귀한 아보카도를 넣은 햄버거가 인기있다. 꼭 한번 맛 보길 바란다. 아보카도의 맛이라는 것이 새콤달콤한 맛도 아니면서 입안에 들어가서 뭉개지는 묘한 질감을 가지고 있다. 디저트로 먹기보다는 듬성듬성 썰어서 샐러드나 샌드위치에 넣고, 고기 구울 때 마무리 단계에 넣으면 망했던 음식도 부활시킨다. 그리고 다 먹고 남은 아보카도 꽁지와 껍질은 샤워할 때 온몸에 문질문질 해주면 다음 날 아침 남의 피부 같은 비단결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먹지 마세요. 피부에 양보하세요."라는 말이 떠오를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함부로 실행해 볼 수 없는 일이니 하와이에서나 한 번 해 보자.
[쇼핑카트용 에스컬레이터가 신기한 1인]
우리나라의 귤은 정말 착한 과일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겨울 귤은 맛있고 비타민도 많고 가격까지 착하니 한겨울에는 손톱 밑이 노랗게 될 정도로 까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그러나 여름에 등장하는 귤은 어떤가. 작고, 달고, 맛있고... 비싸다. 그래서 큰 맘먹고 몇 알 사도 엄마 입에 들어올 것이 없다. 하와이에 만난 귤(mandarin)은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한국에서 먹는 귤과 같은 종자는 아닌 것 같았다. 한국의 귤이 백만 배는 더 달콤하고 상큼했다. 그래도 여름에 즐기는 귤을 떠올리며 감사하게 흡입했다. 엄마도 여름에 귤을 먹을 수 있다! 그 밖에 석류, 파파야, 구아바, 패션푸룻 등등 많았지만 아이들은 그다지 열광하지는 않았다.
견과류와 말린 과일 종류들도 수도 없이 많았다. 아직까지 아이들이 견과류를 좋아하지 않아서 많이 살 수 없었기에 구경만 열심히 했다. 치즈는 견과류 종류보다 더 많았는데 아무리 개별포장이 되어 있더라도 나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양이라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리고 다음 기회에는 술 좋아하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안주 쇼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입에서 발 냄새가 날 정도로 치즈를 먹을 것이다. 이렇게 세이프웨이에 가면 다양한 아이들이 나를 보고 손을 흔든다.
세이프웨이 가격표를 보면 노란색으로 Club Price라는 것이 눈에 띈다. 바로 우리나라에도 있는 회원가다. 회원 드는데 별도의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여행객도 가입할 수 있기 때문에 고민할 것 없이 세이프웨이 멤버십 카드를 만들었다. 쇼핑 전 또는 계산 전에 캐셔한테 멤버십 카드를 만들겠다고 하면 직원도 얼씨구나 신이 나서 가입 신청서를 건네준다. 대충 기입해 주면 바로 카드를 발급해 주고 그 이후로는 회원가의 할인을 받을 수 있다. 좋다, 좋아. 멤버십 카드 하나 만들었을 뿐인데 굉장히 현지화되는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세이프웨이의 물건 가격은 다른 곳 보다 저렴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이건 어디까지나 제 느낌) 그래도 과일은 확실히 품질이 좋은 것 같더라고요. deli(delicatessen: 조리된 음식 판매)도 있고 별다방도 있으니 여행하다가 들려서 간단히 요기도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