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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ttyfree Sep 27. 2021

작가 약력에 쓸 말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사실은 나 자신을 위하여





첫 출간을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말썽이 많은 일이었다. 

그간의 과정을 생각해보면 초고를 쓰는 일이 가장 쉬웠다고 여겨질 만큼, 그 후에 적어내려야 하는 작가로서의 많은 책무들은 나에게 결코 녹록치 않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책에 들어갈 약력 글도 정리해서 보내 주세요. 



작가 약력을 적는 것만큼 곤란한 일은 없는 듯했다. 이제 겨우 첫 책을 내는 나에게 무슨 약력이 있단 말인가.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이럴 때 다른 샘플을 참고하는 것을 루틴처럼 삼고 있긴 했지만, 이것이야말로 다른 책을 참고할 일이 못 되었다. 다른 책의 날개 부분을 보면 온통 'OO상'을 받았고 'OO책'을 냈으며 … 와 같은 화려한 이력이 적혀있는데 반해, 나에게는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난감한 일이로다. 그렇다고 해서 얼렁뚱땅 적어내기도 죄송한 노릇이고, 어떻게 적어야 할까 고민하는 시간 사이에 추석 연휴가 다 지나가버렸다. 고작 몇 문장 적어내기가 어려워서.








몇 년 전 6학년 학생을 가르칠 때의 일이었다. 

중등 영재원 입시를 준비하는 아이였는데, 영재 관련 대학원을 졸업한 데다가 영재원 강사 경력이 꽤 있는 내가 졸지에 자기소개서 코칭을 맡게 되었다. 영재원 입시에는 딱히 아는 것이 없는데, 내게 있는 작디작은 경력이 한줄기 빛이라도 되는 듯한 학부모님의 표정에 노력해보겠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방과 후 아이를 교실에 남기고 자기소개서에 쓸 내용을 정리하는데, 어쩐지 아이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평소 학교에서 말이 많진 않지만 할 일을 묵묵히 수행해내는 아이여서 그 표정이 못내 신경 쓰였다. 


"왜? 무슨 일 있어?"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고 해서 술술 꺼낼 리가 만무한 6학년 말년병장이었지만, 의기소침한 표정을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다른 애들에 비해 너무 초라한 것 같아서요."


동네 유명한 수학 학원을 다니는 A는 이미 다른 친구들의 화려한 이력을 알고 있었다. 초등부터 시작하는 영재원에도 다녀본 적 없고, 흔한 경시대회를 입상한 적도 없는 자신이 영재원 자기소개서에 무엇을 쓰겠냐는 것이었다. 아이의 기죽은 어깨가 참 안되어 보였다. 그 나이에 겪지 않아도 될 좌절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기도 했고, 어떻게든 기운을 불어넣어 주려는 담임으로서의 호기가 발동하기도 했다.


"A야, 영재의 자질이 무엇인 줄 아니?"


A는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대학원 전공 지식과 논문 때도 쓰지 않았던 알량한 지식을 13살짜리 앞에서 최대한 대방출했다. 영재는 말이야, 수학적 창의성과 수학 아이디어 적용 능력과 과제 집중력 …. 뭐 아무튼 그런 것들이 필요한 거야. 네가 아까 말한 영재원 이력과 수상 경력이 아니고.


"그리고, 네가 몇 살이나 되었다고 거기서 그런 걸 바라겠니!"







그런 말을 들은 적 있다. 내가 뱉은 말은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고. 그러니까 좋은 말과 고운 말만 하고 다녀야 한다고 말이다. 

아이들에게 했던 위로가 결국 지금의 나를 향해 돌아오는 신기한 일은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번번이 위로가 되는 것이 신기하다. 나에게 그렇다 할 이력과 경력, 혹은 내세울만한 타이틀은 없지만, 그래도 나름 주어진 꽤 괜찮은 작가의 자질은 있을 수 있다. 그래, 고작 몇 년 살았다고 번듯한 타이틀이 있을 수 있겠어.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와 소탈한 대화를 나눈 뒤 당당하게 중등 영재원에 합격했던 A처럼, 나와의 소탈한 독백을 나눈 뒤, 나도 그제야 덤덤하게 작가 이력을 적어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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