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모 07]
꽤 어릴 때 미술을 시작했다. 재미없는 인생의 대부분을 미술과 함께했고, 희로애락의 한 부분엔 항상 그림이 있었다.
그런데도 어느 한 미술가를 좋아한다 말하기 참 어려웠다. 유명한 사람을 동경했지만 그의 실력을 부러워하기보단 명성과 부를 더 탐냈다. 누군가의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는 사람을 보면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테크닉에 감탄을 할 망정, 그림에 감동받은 적이 있던가? 나는 그림을 그리기엔 너무 모자란 안목을 가진 건 아닌가? 자기 자신을 설득하지 못하는 사람이 타인을 감동시킬 수 있을까? 끝없는 질문은 자기 불신으로 이어졌다.
그즈음 미술사에 흥미를 가졌더랬다. 그림에 감정적 동요를 느낄 순 없어도,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미술이 가지는 의미를 새로이 깨닫는 재미에 오히려 내 적성은 연구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재작년 가을에 시작한 현대 미술사, 정확히는 페미니즘 미술사가 또 한 번의 전환점이 되었다.
주디 시카고, 신디 셔먼, 루이스 부르주아 등 70-80년대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보고 있자니 그리도 궁금하고 갈구했던 ‘감동’이 일었다. 그때 막연히, 감동은 작품에 본인을 이입할 수 있을 때 생기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결국 나는 그동안 공감할 수 있는 미술을 만나지 못했던 게 아닐까, 무려 20여 년간 말이다.
신디 셔먼은 그래서 특별한 작가였다. 처음으로 나에게 내가 틀린 게 아니란 확신을 준 작가였으니. 바빴던 비엔나 일정에서 충동적으로 알베르티나 미술관 대신 신디 셔먼 특별전을 선택했고, 그 감상을 지금부터 말하고자 한다.
셔먼이 주로 사용하는 소재인 사진과 영상이 전시장 안에 가득 차 있었다. 몇 장의 사진을 지나 별실의 암흑 같은 방에 들어서면, 할리우드 영화 속 여성 주인공 장면을 크롭한 영상들이 펼쳐진다. 카메론 디아즈, 줄리아 로버츠, 제니퍼 로페즈, 드류 베리모어 등이 출연한 영화 장면들 대다수엔 금발의 여성 주인공이 나타난다. 아름다운 외면, ‘여성’에게 씌워지는 고정관념-멍청한 금발, 남자에 대한 욕망, 여우 같은 여자 mean girl-등을 연기하는 할리우드 배우의 모습을 보며 시뮬라크르가 떠올랐다.
가상의 이미지가 진짜 대상보다 더 진짜로 받아들여지는, 가짜가 진짜가 되는 세계. 세상을 살아가는 현실 여성이 아닌, 미디어 속 꾸며진 여성 이미지가 ‘진짜 여성’을 대신하는 세계. 어느 순간 현실 여성이 미디어 속 여성상을 욕망하며 흉내 내는 세계. 신디 셔먼은 이 세계를 상반된 영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전시장 맞은편에서 보이는 신디 셔먼의 흑백 영상은, 각각의 영화 영상을 셔먼이 립싱크하며 연기한 모습이다.(기획자는 이를 ‘body karaoke’라고 설명한다.) 현실의 여성이 가상 이미지 속 여성을 표현하는 모습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미디어가 얼마나 현실 여성들에게 해로운 ‘진짜 여성’ 이미지를 심고 있었는지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녀의 초기 사진 작업 역시 영상 작업의 맥락을 같이한다. 할리우드 속 여성의 이미지를 작가 자신이 분장하여 사진을 찍어, 여성에게 가해지는 미디어의 강요를 폭로하는 방식이다.
아래 사진은 그의 70-80년대 작품인데, 아마 그리 낯선 작품들은 아닐 것이다.
흑백 사진 속 여성은 렌즈가 아닌 다른 곳을 응시하며 혼란과 확신 그 사이를 오간다. 특히 위의 두 사진은 대도시에 선 한 여성의 감정을 제대로 포착해냈다. 높고 현대적인 건물 속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여성, 어느 먼 곳을 바라보는 여성. 그토록 높은 건물이 들어 선 도시 안에서 자신이 있을 곳을 찾는 듯한 모습으로. 나는 자극적이지 않지만 관객을 압도하는 이 시기 사진을 무척 좋아한다.
위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 본 작품인데, 여성의 성기가 화면의 중앙선에 걸쳐져 즉각적인 거부감과 함께 숱한 포르노 구도가 생각났다. 여성의 성기-구멍-가 화면을 장악한다. 팔로 반쯤 가려진 얼굴에서 눈만은 뚜렷하다. 정면을 보는지, 다른 곳을 보는지 알 수 없지만 똑바로 뜬 채 화면 밖을 응시한다. 관절을 잇는 이음새와 인형임을 알려주는 신체 장치가 최근 뜨거운 감자였던 ‘리얼돌’ 논란 역시 상기시켰다.
작품으로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이 뭘까. 여성을 수동적인 구멍으로 보는 사회에 대한 비판? 포르노 구도를 사용했지만 성적 의도를 제거했을 때 자세와 상황에서 느껴지는 괴이함? 수동적인 자세와 반대되는 눈이 관객에게 주는 충격? 이 모든 것을 뚫고 나에게 도달한 감정은 이상하게도 수치심이었다. 살아있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인간과 유사한 인형이 취한 자세를 오래 바라보기 힘들었다.
이는 오래 가지고 있던 생각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여성 신체의 주체성을 회복하기 너무나 힘들다는 것. 남성 위주 포르노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시켜 소비한 미디어, 여성 혐오적 시선은 여성의 성기와 신체에 켜켜이 ‘부끄러움’을 주입시켰다. 신체에 가해진 수치심은 인간성을 압도한다. 아무리 인형이 ‘인간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다한들 수치심을 극복하긴 힘들었다.
앞서 말한 ‘공감’은 미술 작품과 관객, 작가를 잇는 강렬한 감정선이다. 때문에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도화선은 예민하고 아슬아슬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같은 주제의식, 비슷한 표현 방식이라도 동일한 효과를 주기 힘들다. 셔먼이 많은 사진과 영상 작업을 통해 보여준 여성의 삶에 공감하더라도, 다른 작품에서 같은 감동을 갖긴 어렵다.
앞서 설명한 Untitled #255이 한 예시이다. 같은 작가가 비슷한 주제 의식으로 다룬 작업일지라도 관객에 따라 감상 포인트가 다르므로, 영상 작업에서 느낀 큰 감동을 받기 어려웠다.(그러나 공감은 역시 상대적인 터라, 누군가는 사진 작업에서 더 큰 인상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정서적인 공감을 넘어서서 작품으로 인해 사회 현상을 떠올리고 그 안의 비합리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안에서 새로운 생각의 도화선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 역시 미술 작품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