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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 앙데팡당 Oct 10. 2020

몸 이야기 : 몸, 여성, 애브젝트(abject)

[오리01]

 스스로 몸을 관찰해본적도, 몸의 쓰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던 내가 작년부터 나의 몸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몸을 이야기하는 작품과 만날 때마다 느꼈던 알 수 없는 흥분이 곧 몸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냥 존재하는 것 같은 나의 몸이 어떤 억압에 둘러싸여 있었는지, 과연 아무런 사유 없이 실존한다고 할 수 있을지 자꾸만 의문이 들었다. 


  <Art In Culture> 8월호에서는 대형 평론 특집 ‘New Vision’이 실렸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30~40대 평론가 10명을 선정하여 그들의 글을 실은 것인데 그중 김정현 평론가의 글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해당 비평의 소개 글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신체는 창작의 필수적 물리 조건이다. 인간의 몸은 언제나 예술 작품의 인식 대상이자 존재의 주요 기반으로 자리매김해왔다. 그 범위는 퍼포먼스, 신체미술, 공연예술에 한정되지 않는다. 김정현은 질문한다. 예술에서 ‘몸’은 무엇인가? 당신의 신체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비평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예술에서 ‘몸’은 무엇인가? 오랜 세월동안 인간의 몸에 대한 관심은 예술에서 꾸준히 드러났다. 어떠한 목적에서건 몸은 계속 그려지고, 표현되고, 감상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몇몇 작품들만 떠올린다고 하더라도 긴 예술의 세월 속에서 어떤 몸이 주로 그려지고 대상화되었는지를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여성 신체는 그려졌고, ‘보이는 것’이 되어왔다. 평론가 김정현은 ‘지배적인 인종과 계급의 타자들은 육체노동, 가사노동, 성 노동에 배치되었다. 그중 단일 인종과 계급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복합적인 정체성을 지닌 대표적 집단인 여성은 예술적 재현의 주요 대상으로서 남성 지배 이념의 미학과 성적 이상이 투사되는 타자화된 장소가 되었다. 이렇게 여성은 예술에서 수동적으로 보이는 것으로 존재했다.’라며 타자화된 여성 신체를 설명한다. 여성의 몸은 그저 수동적인 감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 


 수전 손택은 그녀의 저서 <은유로서의 질병> 서문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질병이 은유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가장 진실한 방법으로 질병을 다루려면 질병을 은유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에 될 수 있는 한 물들어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한다. 이 부분은 나에게 여성의 몸과 예술, 그리고 몸으로 향해지는 시선을 연상하도록 자극했다. 여성과 여성 신체가 특정 시선의 대상이 아닌, 순수한 예술의 매개로, 표현 수단으로서 주체가 되는 것의 시작점에는 여성 혹은 여성 신체에 달라붙어 있는 ‘은유’들을 털어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은유’(이때의 은유는 타자화된 이들에게 달라붙은 것, 이들을 억압한 것들을 의미한다)를 털어내는 방식으로 전복과 전유가 일종의 무기로 작용한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많은 여성 작가들은 여성에 대한 경직적이고 왜곡된 신념과 억압을 ‘대상화’된 신체를 이용하여 고정화되고 대상화된 관념들을 전복해나갔다. 이 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은 ‘애브젝트’(abject)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애브젝트 개념과 현대 미술 속 여성의 몸을 관련지어 연구한다.(작가들 스스로도 애브젝트를 작품 속에 적극적으로 끌어온다.) 애브젝트는 매혹과 반감이 공존하는 불쾌한 대상이자 모든 주체의 정체성과 통일성, 체계, 질서를 무시하고 위협하는 중간적인 것, 모호한 것, 복합적인 것으로서 주체가 주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 억압하고 밀어내야 하는 존재이다(1). (예시로는 음식물, 구토, 오물, 피, 월경혈, 극단적으로는 시체까지 들고 있다) 주체는 이러한 애브젝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상징계로 진입하기 위해 애브젝트를 추방시키는데 이 과정은 ‘애브젝션’이라고 명명된다. 이것은 어떤 대상과 분리를 열망할 때, 그 대상을 역겹고 비천한 것으로 상정함으로써 그 대상과 거리두기가 가능한 감정을 의미하기도 한다(2). 하지만 이 애브젝트는 ‘놀이의 규칙을 인정하려는 것 같지 않은 총체의 바깥에 내몰린 상태에서도 자기 주인에게 도전장을 낸다.’ 즉 그에 따르면 애브젝트는 결코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주체를 찾아와 동일성과 질서를 혼란시키는 존재다. 크리스테바는 애브젝트를 통해 여성 혐오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빨달린 질인 바기나 덴타타나 메두사, 양가적인 어머니의 몸 등 여성의 신체는 애브젝트화되어 억압되었다. 하지만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애브젝트로서의 여성이 동시에 상징계(특히 가부장적 질서)를 위협하고 분열시킬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은유를 털어낼 때, 가장 좋은 무기들은 전유와 전복顚覆이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기부터 여성 작가들은 여성에게 씌워진 경직적이고 왜곡된 관념을 깨나가는 데에 여성의 대상화된 신체를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억압되어온 몸을 통해 고정화된 관념을 전복한 것이다. 이 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은 애브젝트 abject다. 많은 연구자들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애브젝트 개념과 현대 미술 속 여성의 몸을 관련 지어 연구하곤 하는데, 작가들 스스로도 애브젝트를 작품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애브젝트매혹과 반감이 공존하는 불쾌한 대상이자 모든 주체의 정체성과 통일성, 체계, 질서를 무시하고 위협하는 중간적인 것, 모호한 것, 복합적인 것으로서 주체가 주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억압하고 밀어내야 하는 존재다.* 음식물, 구토, 오물, 월경혈, 시체 등이 그가 말하는 애브젝트(abject)의 예시다. 주체는 이러한 애브젝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상징계로 진입하기 위해 애브젝트를 추방시키는데 이 과정은 애브젝션 abjection이라고 명명된다. 하지만 애브젝션의 과정에서 애브젝트는 결코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결코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주체를 찾아와서 혼란을 일으키는 존재가 애브젝트인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애브젝트를 통해 여성 혐오를 이야기한다. 그는 이빨달린 질인 바기나 덴타타나 메두사, 양가적인 어머니의 몸 등 여성의 신체는 애브젝트화되어 억압되었지만, 애브젝트로서의 여성이 동시에 상징계(특히 가부장적 질서)를 위협하고 분열시키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애브젝트으로서의 여성 신체는 여성에게 투여된 고정관념이나 억압에 맞서는 일종의 ‘혁명’의 수단으로 등장한다. 캐롤리 슈니먼의 <내밀한 두루마리>는 작가가 자신의 질에서 자신이 작업했던 여성주의적 글들이 쓰여 있는 두루마리를 꺼내며 읽어나간다. 이는 추하고 더러운 것으로 여겨지던 여성의 성기를 신성한 제의형식을 통해 새롭게 해석하여 혁명적인 힘을 보여주고 있으며, 애브젝트로서의 여성 신체의 저항성을 드러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월경 일지>는 캐롤리 슈니먼이 약 7일간 자신의 월경혈을 휴지 조각에 받고, 달걀 흰자를 이용해 격자 형식으로 붙인 작품이다. 역사 속에서 월경혈은 성적인 정체성의 내부로부터 오는 위협, 살해를 의미하는 피와 연결되어 역시 애브젝트로서 금기시되어 왔다. 이러한 월경혈은 아예 가시적으로 드러낸 <월경 일지>는 오염과 금기의 혐오의 대상임을 넘어 동시에 생명력을 암시하는 월경에 대한 양가적인 관념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성의 신체는 예술 속에서, 작품 속에서 그리고 삶 속에서 여전히 투쟁 중이다. 하지만 평론가 김정현은 위에 언급한 평론글에서 ‘여성 신체-누드 퍼포먼스의 미학-정치적 의미가 그 신체에 대한 여성-작가-주체의 소유권의 차원에서 해석될 우려가 있다. 여성만이 여성 신체를 자율적으로 자기-표상할 수 있다거나 여성 신체-누드 이미지를 통해 ‘순수한’ 여성-주체 재현이 가능하다는 본질주의적 인식으로 이어질 반동적 위험성'을 제기한다. 그렇기에 여성 신체를 통해 기존의 가치 체계를 비판하는 것은  단순한 ‘전유’를 넘어 평론가 김정현의 말처럼 여성 신체에 대한 '진보적 관념의 재구축' 으로 나아가야 함은 중요한 지점이 된다.

  

(+ 지속적으로 경계해야할 것은 우리의 또다른 신체가 ‘애브젝트’로 배제되는 것이다. 사회 전체가 애브젝션의 주체로 어떤 특정 몸을 혹은 어떤 몸의 특징을 애브젝트화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이 질문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만이 모두의 신체를 ‘몸’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게 하는 단초를 형성할 것이라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


 


<각주> 

* 이문정(2012), 「여성 미술에 나타난 애브젝트abject의 ‘육체적 징후’somatic symptom와 예술적 승화」,『현대미술사연구』제 32집,  p.75.

** 정연이, 김남시(2018), 「현대 미술에 나타난 애브젝트로서의 여성의 몸 :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애브젝트 개념을 중심으로」, 『현대미술학 논문집』 제 22권 제 1호, p. 48 

*** 정연이, 김남시, 위의 글, p.51.


*참고문헌

김정현(2020)의「예술의 신체적 수행성」,『아트인컬쳐』(2020년 8월 호)

이문정(2012), 「여성 미술에 나타난 애브젝트abject의 ‘육체적 징후’somatic symptom와 예술적 승화」

정연이, 김남시(2018), 「현대 미술에 나타난 애브젝트로서의 여성의 몸 :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애브젝트 개념을 중심으로」

수전 손택(2002),『은유로서의 질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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