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미11]
본격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서 가을이 우리에게 성큼 다가왔다. 필자는 계절마다 생각나는 작품을 브런치를 통해 소개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색다른 주제를 가지고 올까 한다. 평소 패션에 관심이 많고 이렇게 계절이 바뀔 때면 어김없이 옷을 비롯한 다양한 아이템을 구매한다. 그중에서도 요즘 모자를 관심 있게 찾아보다 문득 베레모에 눈길이 갔다. 생각해보니 베레모는 화가들의 모자 아닌가? 이러한 궁금증을 가지고 정보의 바닷속으로 뛰어들어 몇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우선 네이버에 화가 베레모를 검색해보니 지식인에 필자와 같은 물음을 가지고 질문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실제 미술계에 종사하는 분이 답변을 남겼다. 그분의 말씀으로는 미술 종사자들이 시간을 구애받지 않고 야간작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머리나 수염을 비롯한 관리가 잘 안된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누가 찾아올 수도 있고 관리가 귀찮기 때문에 모자를 선호하는데 앞에 챙이 달려있는 모자는 작업할 때 방해가 되기 때문에 베레모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본격적으로 베레모의 기원과 역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우선 베레 Beret는 프랑스어로 펠트로 만든 챙이 없는 둥근 모자를 말한다고 한다. 베레는 일찍이 크레타 시대부터 사람들이 착용했고 그리스와 로마 시대를 거쳐 각각 필로스와 필레우스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이후 동물의 털을 이용한 둥그런 모자가 일정한 디자인을 유지한 것은 14세기경부터였으며 주 사용자층은 네덜란드, 벨기에의 농민이었다. 이러한 펠트 모자는 돈이 없고 여유 없는 사람들이 쓰는 장식 없는 납작한 모자였지만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이 자신들의 직업적 상징으로 이 납작한 펠트 모자를 쓰기 시작했다.
바로 우리에게 자화상으로 많이 알려진 렘브란트와 진주 목걸이를 한 소녀로 유명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가 베레모의 유행에 앞장섰다. 그렇다면 그림 속 베레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림 속 베레의 의미에 대해 미술사가들은 여러 가지 견해를 내놓고 있다. 그중에서도 필자는 지식과 박식함을 드러내는 예술적 장치임과 동시에 인생무상의 의미를 조명하고 싶다. 당시 베레는 대학기관의 학자를 위한 공식 정복으로 사용되었다. 유럽의 대학에서 박사 과정의 졸업식에는 반드시 이 베레를 착용해야 했고, 이로부터 베레는 곧 그 사람의 학식에 대한 일종의 표시가 되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한 명확한 이유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가 없지만 렘브란트는 베레와 고풍스러운 의상을 입은 모습을 초기 작품에서 자주 남겼다. 렘브란트는 초기에 역사화를 그리는 화가로서 이름을 날리며 역사화 제작을 위해 인문학 지식을 흡수한 장인의 이미지를 초상화를 통해 남기고 싶어 했다. 베레는 그의 이미지를 위한 하나의 장치로서 그려졌으며 이후 그의 화풍을 모사한 많은 화가들이 이를 따라 하면서 일종의 유행처럼 굳어졌다고 네덜란드의 미술사가 마리케 드 빈켈은 말한다.
또한 베레는 인생무상을 의미했다. 이것은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의 주류적 특징인 '바니타스' 회화에서 비롯되는데 바니타스는 덧없음을 의미하는 단어로 생의 유한함과 신을 통한 구원이라는 주제를 다양한 정물과 초상을 통해 표현했던 회화의 하나의 경향이었다. 대표적으로 해골과 뼈, 엎어진 유리잔, 거울, 책 등이 이러한 주제를 상징했다. 삶의 유한성에 대한 메세지를 우의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바니타스 그림에는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군인의 모습이 자주 담겨 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베레는 화가의 모자이면서 동시에 군인들의 모자로서 기능했다. 그로 인해 베레를 쓴 채 한 손에 해골을 들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을 많이 보았을 것이며 그 모습을 통해 베레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삶의 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정서는 렘브란트 후기 자화상에도 느껴볼 수 있다. 아내를 잃고 삶의 의지를 잃은 그의 어두운 얼굴과 표정이 그 예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화가가 쓰고 있는 베레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본고를 읽고 과연 여러분은 화가들이 베레모를 쓰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미술사에서 여러 가지 상징을 가진 메테포를 발견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복식에 관심이 많다. 미술사가들이 제시하는 메타포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이고, 그중에서도 내가 끌리는 이야기를 글로서 소개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평소 전문적으로 아는 분야가 아니라 좋아하면서도 글을 쓰기 어려웠는데 이번 기회를 시작으로 미술 속 패션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부디 다음 편도 기대해 주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참고문헌
김홍기(2017),『샤넬, 미술관을 가다』, 아트북스, 248-255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