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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독일에서] 동료들의 '그사세'에 초대되다

독일인, 그들이 사는 세상

by 노란대문

나는 사실 MBTI로 따지자면 "E"에 가까운 사람이기는 하다. 하지만 회사 동료가 친구는 아니지 않나. 회사 사람이랑 개인적으로 엮이고 싶지가 않다. 친밀해지고 싶지가 않고 내 개인사를 굳이 굳이 말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왜냐면 친해지면 기대가 생기고 기대가 있으면 실망이 자리하는 법. 그냥 사무적인 관계에서 그린듯한 미소만 주고받으면 이 얼마나 깔끔한 인간관계가 되겠는가. 정 많은 한국에서 나고 자란, 천성이 정 없는 인간. 나에게 정이란 노력하고 애쓰고 힘내야 하는 그런 것이다.


그런데 이 차갑고 정 없고 외롭고 황량한 독일땅에서 만난 첫 직장의 동료들은 그렇게 나에게 친하게 지내자는 사인을 잔뜩 보냈다. 우리 맥주파티 할라는데 올래? 우리 공원 가서 맥주 한잔 할라는데 너도 올래? 우리 같이 밥 먹으러 갈 건데 올래? 우리 같이 커피 마실래? 우리, 우리, 우리...


그때마다 난 참으로 한결같은 미소로 대꾸했다. 어머 끝내주는 계획이다. 무척 재밌겠다. 그런데 나는 괜찮아. 난 좀 쉬고 싶어. 권해줘서 고마워.


그렇게 거절과 초대 끝에 거부할 수 없는 권유가 들어왔다.

'너도 이 세계에 들어와!'라는.




한동안은 혈액형이었고 한동안은 별자리 었고 한동안은 MBTI였다. 이제는 인간은 또 어떻게 요모조모 분류하려나 했더니 테토와 에겐까지 나타났다. 이 수많은 유사과학과 유사어쩌구들이 합쳐지면 그럴듯한 인간 군상 만들기가 될 듯하다. 거기에 의거해서 말해보자면 활발하기로 소문난 혈액형에다가 외향이라는 "E'시작하는 MBTI도 가지고 있다. 모아놓은 자료들만 보자면 사람 좋아 사람일 것 만 같지만 사람 싫어 인간이기도 하다. 물론 인간은 다들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이랬다가 저랬다가 한다지만 내가 '정이 좀 없는' 인간인 것은 확실하다. 약간 기질이라고 하던가, 성정이라고 하던가. 가지고 태어난 것보다 자라면서 습득한 사회성으로 무장하며 살고 있다.


이러니 독일에 산다고 했을 때, '오 너는 잘 맞겠다'라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지인들도 꽤나 있었다. '거기는 좀 서로한테 관심도 없고 혼자만 잘하면 되는 나라 아냐?'라는 이야기와 함께. 오 물론 영미권의 친밀도와 사회성과 비교해 보자면 상반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뭉치기'에 힘내는 사람들은 아니기는 하다. 그러나 더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 보면 서로에게 기대 사는 인간들이 어디를 가겠는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다가 뭉치자는 권유를 안 하는 게 아니다. 그 시도의 순간이 한국보다 많이 느릴 뿐.


여하튼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나는 회사에서 만난, 그리고 공적인 자리에서 만난 동료들과 친구가 되는 것에 꽤나 회의적인 입장이다. 마음이 안 맞는다고 얼굴을 안 볼 수도 없는 사이, 친밀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공동체가 아닌 수익 창출을 위해 누군가의 기준을 통과해서 만난 사람들. 이 사이에 어설픈 우정이 끼어들어갔다가 이도저도 아니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것 같다. 친해지면 기대가 생기고 서로의 알 수 없는 기준을 채우지 못하는 기대는 실망이 되고 실망은 칼이 된다. 그러면 도망칠 수도 없는 이 수익창출의 공간이 지옥이 될 것 만 같았다. 게다가 인간은 보통 잠깐 보면 나쁘지 않은데 계속 보면 단점도 보이고 안 맞는 부분도 보이는 것이니까는. 우리 회사는 극강의 팀풀을 하는 회사이다 보니 만나는 시간이 참 짧고 굵다. 그러니 출근해 있는 동안만큼은 누구에게나 웃어주고 인사를 나누는 좋은 동료 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나 퇴근 이후의 생활에서는 장담할 수가 없고.


그래서 동료들이 퇴근 이후에 연락 오면 답장도 거의 안 하고, 다음날 출근 전에 호닥닥 답장해 버리고 (보통 웃긴 짤 같은 것을 보내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맥주 한잔 같이 하자는 권유는 가차 없이 거절했다. Probejahr(시험기간- 보통 신입사원이 동료들 사이에서 적응을 잘하는지, 실무능력은 어떤지 판단하는 기간) 동안 맥주권유를 다 쳐내면서 약간 걱정도 되었지만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척하고 싶지도 않았다. 회사사람이랑 와인 한잔도 하기 싫은 마음, 쓸데없이 실수할 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은. 참 이기적이고 차가운 마음. 어째 성향으로 따지면 '그 차가운 독일인'보다 더 독일인 아닌가.


여튼 밥도 안 먹는다고 하고 술도 안 먹는다고 하고. 커피도 안 마신다 하는 이 일만 열심히 하는 동료와 친하게 지내보려고 다들 노력을 무진해줬다. 놀고먹는 일로는 꼬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자네, 그것 좀 하나?'라는 질문이 들어온 것도 이맘때쯤이다.


'우리 신입, 달리기 좀 하는가?'라는.


환갑이 되어도 짱짱한 동료들을 보며 '너는 왜 이렇게 체력이 좋아?' 하고 물어보곤 했다. (수평적 구조의 회사입니다.) "내가 작년에는 산으로 들로 강 위로(?) 뛰어다녔어. 지금은 관절이 안 좋아서 수영만(?) 해."라거나 "나 지금도 거의 매일 뛰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생활체육인들의 집합소가 아닌가. 체력은 국력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다들 어째 아프지도 않고 (병가 쓰고 싶을 때만 아플 수 있는 선택적 건강체질들) 매일매일 씩씩하게 출근한다. 출퇴근도 자전거 타고 오는 사람이 반 이상, 한 10퍼센트 정도만 자차를 가져온다. 그나마 젊은 피들은 백이면 백 걸어오거나, 자전거를 타고 온다.


옛날옛날 유학생 시절부터 길거리에 뛰는 사람이 한가득이었으니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달리기라는 것을 좀 했었다. 한때는 내가 하루에 스쿼트도 400개씩 하고 달리기도 매일 5킬로씩 뛰고 그랬었다. 그리고 슬쩍 지나간 운동 좋아 시절. 그러나 훈장처럼 남겨놓은 5K 마라톤 사진이 발목을 잡을 줄이야. 친구가 되기는 싫지만 SNS친구가 되자는 권유까지는 거절하지 못해서 은근하게 펼쳐놓은 사생활을 좀 보였다. 그랬더니 그 뒤로 달리기 어플로 친구가 되자는 권유가 슬쩍 넘어오더니 곧 있을 마라톤 대회에 같이 참여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어휴 아냐, 나 이제 그렇게 오래 못 뛰어.'

'하하하!! 금방 늘어 걱정 마. 다 할 수 있어.'


거절은 거절당하며 마라톤 대회에 같이 나갈 동료들이 추려졌다. 얘도 나가고 쟤도 나가고, 너도 이제 가서 등록하면 돼. 어어어? 하고 거절할 새도 없이 옷자락이 붙들려 사무실에다가 거의 타의로 이름을 제출하고야 말았다. 왜 우리 회사는 자체 마라톤 대회가 있는 것일까. 왜 운동복까지 맞춰주는 것일까. 왜 다들 건강해서 달리기를 잘하고 난리일까 왜.. 이제는 뛰지도 않으면서 사진을 안 내렸을까. 자랑하기 좋아하고 척하기 좋아하던 한 인간은 이렇게 다시 운동화를 신어야 했다.


아아, 그 뒤로 매일같이 오늘은 뛰었네, 어제는 안 뛰었네. 하는 인사 안부인사를 던지는 사람이 10명이 넘었다. 무릎이 아픈 것 같아서 말이야- 하면서 슬쩍 발을 빼려는 시도도 해보았지만 되려 선물로 무릎 보호대를 받았다. 아.. 운동을 이렇게 다시 시작하게 될 줄이야. 마라톤 대회가 한 달을 앞뒀을 무렵. 이제 20일 남았네 하며 카운트다운을 해 주는 동료가 20명이 넘었다. 어딜 가도 '너 마라톤 나가지?' 하는 인사가 넘어왔다. 출전도 안하면서 '왕년에는 내가 말이야'하면서 온갖 팁을 주려는 사람도 못해도 열명이었다. 응원하러 갈게! 화이팅. 다들 이렇게 말을 맺었다. 아니 쉬는날이잖아. 쉬어 왜..왜 이걸 응원까지 와. 마자 입밖으로 거내지 못한 이야기가 목구멍에 머물렀다. 응원해주는 동료들을 보며 당일에 아프다고 하고 빠져버리려던 계획도 그렇게 물거품이 되었다.


기대감을 가지지 말라고 친밀감을 안 쌓으려고 노력했더니 되려 이상한 부분에서 기대를 받는 사람이 되었다. 새로 온 젊은 피가 얼마나 잘 뛰는지 보자고 마라톤에 출전하지도 않으면서 구경 온 사람이 한가득이었다. 나는 심지어 사양하고 거절해서 겨우 5K 마라톤에 출전했지만 10K 마라톤에 출전하는 사람은 더 많았다.


그렇게 땀 뻘뻘 흘려가며 독일인의 그사세, 운동의 세계에 초대받았다. 거절할 수 있는 명분도 없어 어영부영 끌려들어 갔다. 그 마라톤이 끝나고 또 한동안 호닥닥 달리는 얼굴이 사진에 찍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기념으로 올라갔다. 사내 게시판에도 붙었다가 회사 공식 SNS에도 올라갔다가.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푸는 이유는 올해도 도망가기를 실패하고 장렬하게 또 끌려가기 때문이다. Probejahr도 끝난 사람으로서 작년보다 훨씬 더 단호하게 거절을 외쳤지만, 일주일 내내 마라톤을 같이 나가자고 외치며 따라다니는 동료들에 둘러싸이다 스스로 거절을 포기했다. 그래 눈 딱감고 30분만 뛰면 되는걸, 그냥 하고 말지. 하는 마음이 들어버렸다.


이번에도 내 이름을 마라톤 리스트에 올리며, 먹고 놀자는 권유보다 그래도 기쁜 마음으로 눈물을 머금고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낯가리고 까칠한 외국인 동료도 기쁘게 품어주려는 친절한 독일 사회. 이제 달릴 시간이다. 술도 밥도 커피도 싫었는데 제일싫은 운동을 같이한다. 하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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