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일까 시험일까
그런 날이었다. 무척 더워서 에어컨 없는 독일 생활에 집을 나서야겠다는 마음이 일었던 날. 어디를 갈까 하다가 회사에 가서 가져올 것도 있고 정리할 것도 있으니 잠시 들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달.
마침 휴일이었던 회사는 몇 달 동안 이어오던 건물 리모델링을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그동안 커다랗게 공사현장을 가리고 있던 가림막이 내려가고 공사 인부들은 그동안의 자재를 치우며 마무리 단계에 돌입하고 있었다. 한동안 입구가 막혀서 샛길을 이용했어야 했는데 길도 깨끗하게 뚫려 있었다! 드디어!
가는 길에 커피도 한잔 사고, 그러면서 열쇠를 받아야 하니 경비실에 줄 간식도 하나 구매했다. 이렇게 서로 위로하며 사는 것이 직장생활의 묘미이지 않겠는가. 작은 과자 하나로 열쇠를 넘겨받고 건네주는 이가 잠시라도 웃을 수 있으면 좋으니까.
먼지 구렁텅이였던 곳을 지나가며 인부들과 할로- 할로 하고 인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경비실에 도착했다.
그동안 공사 때문에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다. 너는 대체 왜 휴일에 여기에 나왔냐. 는 얼굴에 과자를 하나 내밀며, 집은 덥고 카페라도 갈까 하는 길에 잠시 들렀다며 필요한 방열쇠를 받았다. 물론 그 사이에, 요즘의 독일 여름은 미친 것 같다는 날씨 토크와 휴일에 회사에 나온 우리 두 사람의 인생에 대한 작은 한탄이 이어지고 과자에 고마움을 전하고 받는 일도 있었고.
"근데 너가 가는 쪽이 공사로 한동안 난리였던 부분이야. 알지? 조심하고"
"어 알고 있어. 근데 이제는 출입은 되는 거잖아 맞지? 방 리모델링은 끝났다고 들었는데"
"어 맞아. 입구 쪽에 자재들이 쌓여있으니까 조심해"
"오케이, 알려줘서 고마워! 당케!"
회사에 놓여있는 개인 사물함이 있는 방이 바뀌었고 한동안 개인 짐을 다 빼서 집에 가져다 놓으라는 안내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사물함을 사용할 수 있으니 원하면 개인물건 가져다 놓으라는 이메일을 받은 참이었다. 요모조모 챙겨가는 소지품에는 출근 뒤 겉옷을 걸어놓기 위한 옷걸이, 약간의 개인 상비약, 핸드크림 뭐 그런 잡다한 것들이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사물함 위치 확인도 하고 내 자리에 물건도 차곡차곡 가져다 놓고 새롭게 리모델링된 부분도 슬쩍 구경해 봤다. 확연히 깔끔해진 복도를 지나 잠시 머물다가야 하는 일을 하러 열쇠를 받은 방으로 들어섰다.
커피 한잔과 집보다는 시원하고 또 고요하기까지 한 공간. 쉬는 날에는 회사 공간조차도 사랑스럽다. 놀랍게도. 그 한 귀퉁이에서 휴일에도 여기에 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집중모드로 들어섰다. 그런데 잠시 뒤 "삐용-삐용" 하는 작은 새된 소리가 울리는 것이 아닌가.
비상벨인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한 그런 소리.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더위에 지친 인부들이 공사헬멧을 벗고 잠시 쉬는 시간인 모양이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을 떨기도 하고 길에 누워있는 사람도 있고. 여하튼 깔깔깔 웃는 소리가 들려오고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에잉, 그냥 건물 점검하는 알람인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창문께를 떠나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업무시간에 화재 알람 겸 예방을 위한 시범가동이 있었던 날이 있었다. 그날은 정말 귀가 찢어지도록 온 건물을 울리는 소리와 "다들 밖으로 나가요!"라고 안내해 주는 목소리들이 있었고 모두가 불시에 울린 알람을 듣고 일사불란하게 밖으로 나가는 비상구를 찾아 나갔었다. 그날의 기억이 얼마나 선명한지. 비상벨은 이렇게 울리는구나 싶었었다.
게다가 독일은 구급차와 소방차의 알람소리가 한국의 한 네 배는 되는 것 같다. 웬만한 차소리는 막아주는 이중창을 닫아놔도 소방차소리는 그 창을 뚫고 들어올 정도이다. 길에 가다가 소장차가 옆을 지나가 기라도 하면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귀를 틀어막을 정도이다. 그러니 감자기 울린 앵-앵 거리는 소리는 다른 방에서 시행하는 듯 한 안전문 시험 소리 정도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또다시 "삐이옹- 삐이옹" 하는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조금 소리가 커졌고 시간도 좀 더 길게 지속되었다.
'도대체 뭐야, 불이 난 건 아닌 거 같은데. 리모델링 마무리 단계라서 시범 운행해 보나?'
또다시 슬금슬금 창가로 가서 밖을 보았다. 아까 널브러져 있던 인부들은 그대로이고 그 주변으로 다들 모여서 물도 마시고 음료도 마시며 여전히 왁자지껄, 신나는 분위기처럼 보였다.
'그래 어차피 거의 다 했으니까 얼른 마무리만 하고 나가야겠다. 시끄럽네.'
알람 소리는 또 금세 그쳤다. 내일이면 정상 운영되어하는 건물이니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확인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삐-용, 삐-용"
하는 알람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그래, 이 정도면 그냥 나가라는 말과 다를 게 없다. 어차피 마무리도 다 했고, 더 앉아 있어 봤자 이게 뭔 소리인지 고민하는 시간이 더 길 것 같으니 문을 잘 잠그고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것을 선택했다. 그렇게 깨끗한 복도를 지나 아직 공사 자재가 쌓여있던 복도를 지나 건물의 문을 열며 밖으로 나갔다.
"어? 너 뭐야?"
자기들끼리 깔깔 웃고 있던 공사 인부중 한 명이 눈을 마주치자마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아직도 안에 있었어?"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실실 웃고 있던 얼굴들이 무섭게 굳으며 나에게 향했다.
"아니, 우선 더 밖으로 나와 거기 붙어있지 말고."
발걸음도 즐거웁게 타박타박 걸어 나오던 나는 영문도 모르고 눈을 둥그렇게 뜬 채 건물과 조금 멀어졌다.
"알람 울리는 소리 못 들었어?"
바닥에 놓여있던 모자를 집어 들며 눈을 마주쳤던 인부가 물었다. 오, 뭔가 잘못한 거 같은데.
"어 듣긴 들었는데, 화재알람이야 이게? 몰랐어."
"오 세상에. 어떤 알람이든 들리는 순간 나와야지! 계속 남아있으면 어떡해!"
"그러게, 미안."
"아니 나한테 미안할 일은 아니지. 위험하잖아. 조심해야지!"
그가 뭐라 더 말을 이어가려고 하자 다른 동료가 그 어깨를 툭툭 치며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다음부터는 알람이 들리면 바로 나와. 그래야 해. 알았지?"
좀 더 누그러진 투로 다른 동료가 이야기를 맺으며 어서 갈 길 가라고 안녕을 건넸다.
그들 뒤로 소방차 한대와 구급차 한대가 회사에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큰 소리를 내는 소방차 알람이 멎고 방화복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소방사 세 명이 건물로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나도 열쇠를 반납해야 하니 얼결에 비슷한 길을 돌아 바깥과 닿아있는 경비실에 도달했다. 열쇠를 반납하자 아휴 알람 때문에 시끄러웠지? 하며 어서 갈길 가 보라고, 자기는 소방사를 만나봐야 한다고 바쁘게 멀어지는 경비의 등 뒤로 인사를 건넸다.
세상에나. 어쩜 이렇게 안전불감증일 수 있었을까. 스스로가 살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한 사람과 다를게 무언가. 아무리 확인차 울린 알람이고 공문이 나왔던 상황이라도 인부들은 다 빠져나가 있었고 소방사는 방화복을 차려입고 건물에 도달했다. 알람이 울리든 말든 그냥 건물에 남아할 일을 하던 사람은 아마 나 하나였을 것이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고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사실 내가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몇 번인가 화재 알람 같은 비상벨이 울려도 선생님들이 슬쩍 복도랑 바깥을 보고서는 '됐으니까 다들 앉아서 공부해라.' 하는 문화였다. 아마 성인이 된 후에도 누군가 후닥닥 빠져나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냥 '에이 잘못 울렸나 보네'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독일회사에 입사 후 분기별로 화재 알람과 예방 훈련을 받으면서도 유난도 이런 유난이다 싶었다. 진짜로 불이 나면 다들 뛰어나가겠지 싶으면서도 설마- 하는 마음이 훨씬 더 있었고.
만약 이게 실제 상황이었으면 어물어물거리다가 빠져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공사하는 인부들 입장에서는 화재 알람이 세 번이나 울린 건물에서 느지막이 걸어 나오던 인간을 보고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을까.
정말, 정말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제서야 일하던 도중 알 수 없는 이유로 알람이 울리자마자 나가야 한다고 사람을 독촉하던 동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누구랄 것 없이 알람이 울리자마자 필요한 물건을 착착 챙기면서 나가자고 소리치던 사람들. 별일 아닌 오작동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때도 두 세대씩 전속력으로 달려오던 소방차와 방화복을 입은 소방대원들. 심지어 건물 안에 들어섰다가 다시 나와서 소방차 앞으로 복귀할 때까지 누구 하나 모자도 벗지 않던 모습들.
나는 안전불감증이었구나. 부끄러운 깨달음이었다. 살자고 마련해 놓았던 비상벨이 울려도 멀거니 쳐다만 보던 나. 에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죽음과 가까워졌다. 꿈이 다 뭐고 노력이 다 뭐며 일상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비상벨 소리 하나에 움직일 마음조차 없었으면서. 이제는 비상벨이다- 싶은 소리만 들려도 파닥닥 나갈 것이다. 나를 보자마자 진심으로 소리치던 그 아저씨게 마음으로나마 감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