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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대문 Oct 06. 2023

유럽집 로망에 찬바람이 불면

코가 꽁꽁 손이 꽁꽁 발이 꽁꽁!

아, 왔다. 그 계절이 왔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겨울의 길목.


찬바람은 불지만 햇빛은 없고, 난방은 없지만 따뜻함을 찾아 헤메야 하는 - 한마디로 방이 바깥보다 추워지는 시기.     



독일에 살기 전, 천장이 높고 고풍스러운 외양을 자랑하는 소위 ‘유럽식 건물’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발코니에 나가면 아름다운 화분이 있고, 왠지 어디선가 빵 냄새가 솔솔 올라와야 할 것 같고. 방에는 커다란 침대가 있고, 슬리퍼를 신고 가운을 툭걸친 채, 집안을 활보하는. 아 멋진 나. 그놈의 슬리퍼와 가운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유럽-로망. 그런 잔잔바리 로망이었다. 심지어는 방 안에 멋진 픽시 자전거도 착 놓여 있는.

   

하지만 여긴 엄복동의 나라도 아니면서 바깥에 묶어놓은 자전거는 밤이되면 하나하나 부품이 사라지는, 천사소녀 네티가 사는 나라다. 그래서 비싼 자물쇠에 묶여있던, 자전거 였던- 무언가만 오롯히 남아있는 나라. 그러니 집 안에 들여놓는 먼지 꾸덩이의 자전거의 진실은, 그저 도둑이 두려운 마음일 뿐이렷다.


아아, 언젠가는 좋은 자전거 였었을,  무언가의 잔상

그리고 그 가운과 슬리퍼 또 어떠한가. 그것은 로망이 아닌 생존도구가 되시겠다.

따뜻함을 넘어서 뜨끈함을 자랑하는 아랫목이 키워낸 나의 어린 시절. 맨발로 내딛는 발마다 후끈하게 데워주던 그 온기는 오로지 한국의 것이었다. 처음 맞이한 독일의 가을은 나에게 빨간 코와 허옇게 질린 발을 선물 해 주었다. 바닥 난방이 없는 나라. 공기가 데워지지 않는 나라.    

  

아침마다 코가 시려워 잠에서 깨어 손으로 차가운 코를 꼭꼭 눌러 주는 것이 기상 패턴이 되었다. 그리고 바깥 공기보다 차가운 바닥은 그 냉기를 누르기 위해서 털 달린 슬리퍼 여러 개를 집 안에 들여놓게 만들었다.


러그? 있으면 좋았겠지. 하지만 러그가 있어도 차갑고, 러그가 없어도 차갑고. 뽀득뽀득 세탁기로 빨지도 못하는 러그는 유학생에게 사치아닌 사치였다. 작은 러그를 하나 구매해서 책상 아래에 두고 쓰다가 러그 전용 세제로 청소하던 세번째 날, 그것을 당장 중고로 내다 팔았다. 그리고는 작은 무릎담요를 하나 구매했고. 세탁기에서 휘리릭 빨리지 못하는 것들은 아직까지는 우리집에 입성할 자격이 없다.

      

아아, 옛날이여. 날이 추워지면 찜질방으로 피신해서 뜨근함에 몸을 굴리는 노릇한 군고구마가 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차가운 공기속, 오롯히 피어나는 내 체온의 훈훈함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겹겹이 옷을 덧 입는다. 수면가운을 입고, 후리스를 입고, 수면양말도 신고, 털 달린 슬리퍼까지. 가끔은 목도리도.

     

심지어 이 유럽의 구옥들은 천장이 어찌나 높은지, 천장 조명을 갈아야 하는 일이 생기면 사다리부터 펼치고 올라가야 한다.

의자 밟고 올라서서 갈아끼우는 건 키가 2미터는 넘어야 가능할 것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도 꽤나 높은 천장을 자랑하는 터라 커텐을 처음 달 때 사다리가 동원 될 정도였다. 그저 커튼 봉에 새로운 커튼을 끼워 넣는 작업을 하는 것 뿐이었는데도! 길쭉하고 좁은 모양새를 자랑하는 창문을 가리려다보니 커튼은 키를 넘어서는 길이를 자랑한다. 천장에서부터 내려오는 길이도 아니지만 이미 쉬운 길이는 훌쩍 넘어선다.


그러니 가끔 집 안에 다리가 어러개인 불청객들이 찾아들어와도 천장으로 날아 버리면 아주 골칫거리다. 하얀것은 페인트요, 까만점은 벌레요. 그 까만 점이 손 닿는 놓이까지 내려오기를 기다리다가 잽싸게 달려나간 것이 한 두번이 아니다. 마치 그, 말벌아저씨처럼.


그래서 종종 기꺼운 더부살이를 한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천장은 초청한 적 없는 거미친구가, 그 아래로 내려오는 친구는 내가 처리한다는 마음으로 거미와 더부살이 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나는 아직 기꺼운 더부살이를 하기에는 마음이 넓지 않아 전기 파리채를 구입한 차가운 인간이지만.


여하튼, 이제부텀 차가운 공기 속에 빨갛게 얼어가는 코를 녹이느라 하루의 반을 다 쓸 예정이다.     


시간이 지나 겨울의 초입이 되면 난방이 나오니 Heizung(하이쭝-히터)옆에 붙어앉아 몸을 녹힐 수 있는 열기라도 찾을 텐데, 가을의 초입에 난방은 백년은 이르다. 다행이도 이번주 초, 찬바람이 부는 것 같아 겨울 옷을 몽땅 꺼냈고, 옷장 한 구석에 박혀있던 물주머니도 찾아놨다. 보글보글 물을 끓여 도톰한 물주머니 안에 넣고서는 그 작은 열기를 가만히 품을 예정이다.


물주머니가 데워주지 못하는 얼굴, 특히 차가운 코는 따끈한 찻 김으로 데워줘야지. 따뜻한 한국의 품에서 벗어난 첫 해의 코는 노상 훌쩍이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차가운 독일 땅에서 몇년이고 버텨낸 코는 이제 이 정도 추위쯤은 훌쩍이는 소리도 내지 않고 넘길 수 있게 되었으니까.




단단히 무장했으니 성실하게 흐르는 시간이 몰고 온 추위도 온통 두 팔 벌려 안아볼테다. 또 새로운 계절의 시작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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