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투 헬!!!
독일에는 전역에 펼쳐져 있는 명물이 있다. 돈을 내도, 표를 사도, 심지어 좌석을 구매해도! 제시간에 도착한 날은 손에 꼽는 엄청난 명물! 날이면 날마다 늦어지고, 날이면 날마다 취소되는! 이름하야 도이치 반(Deutsche Bahn) - 줄여서 DB라고 하는데, 다들 <딜레이반>이라고 놀리기 바쁘다. 맨날 늦어지는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기 때문에.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차가운 안내 방송은 바쁘다. 끊임없이 “딩동-‘하는 알림음 뒤에, ‘1번 플랫폼 기차는 들어오는 중이고, 2번 플랫폼 기차는 5분 늦어질 거고, 6번 플랫폼 기차는 70분 연착입니다- 미안요‘라는 안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절대 미안합니다, 내 잘못입니다.라는 표현대신 ‘유감입니다’를 즐겨 쓰는 나라에서 기차 연착 방송에는 - 미안합니다 ‘를 녹음해 놨다. 미안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인데, 기차역에 서서 하릴없이 오지 않는 거대한 이동수단을 기다리고 있자면 그 안내방송의 미안하다는 말이 오히려 화를 돋운다.
독일 기차는 보통 세 개의 종류가 있다.
가장 빠르고 멀리 가는 고속 열차 ICE, 그리고 가격과 속도가 좀 더 낮은 IC 혹은 EC, 마지막으로 한두 시간 거리를 이어주는 지역기차인 RE.
코로나의 여파가 지나가고, 한동안 위축 되었던 여러 가지 여행 사업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9유로 티켓”이라는 파격적인 교통권이 출시되었었다. 단돈 9유로- (한화로 약 14000원)만 내면 RE를 포함한 독일 전역의 모든 지역 교통권을 모두 사용할 수 있었다. ICE나 Ic(Ec)를 이용하면 한 번에 갈 수 있는 거리도 단돈 9유로 교통권에 포함된 RE를 이용하면 두세 번의 환승으로 목적지애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아주 매력적인 옵션이 아닐 수 없었다.
그전에는 베를린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한 달 티켓이 80유로에 육박했으니, 얼마나 큰 혜택인가. 하지만 단 3개월을 시행한 9유로 티켓은 너무 많은 이용객들 때문에 수많은 열차 고장과 연착을 일으켰다. 덩달아 ICE나 IC를 구매해서 이용하는 승객들도 엄청난 연착의 소용돌이에서 함께 빙글빙글 돌아야 했다. 늦어지는 기차 안에 있으면 60분 이상 지연부터는 깨알 같은 보상정책도 제공하지만 - 티켓 가격의 25% 정도 돌려준다) 너무 깨알이라서 오히려 화만 날 정도이다.
어느덧 3개월이 지나고 나라에서는 다시 원래 가격으로 교통권을 회기하고 싶었지만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여러 지방 정부와 의논 끝에 ‘49유로 티켓’을 출시했다. 이전 9유로 티켓과 동일한 옵션을 제공하고, 충분히 수용 가능한 가격이기 때문에 꽤나 많은 사람들이 이 티켓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그래서 여전히 인기 많은 구간의 RE는 미어터지고 돈을 내고 구매하는 고속철도(ICE, IC)도 신나게 연착된다. 제일 황당한 순간을 손에 꼽으라면- 60분이 넘으면 승객에게 보상을 해줘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59분 안쪽으로 연착 시간을 맞추려는 술수를 접했을 때이다.
얼마 전 베를린에서 약 서너 시간 정도 떨어진 도시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전부터 DB어플에서 내가 예매한 기차가 영원히 늦어지고 있다는 알람이 띠롱띠롱 울리고 있었고.
하지만 시간은 이미 20시를 넘어가고 있었고, 당일에 호텔을 잡기에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일 때문에 잠시 들린 도시라서 지리도 모르는 데다가 모르는 도시에서 밤늦게 배회하는 것은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일이니까.
따라서 내가 생각한 최적의 방법은 어떻게 해서든지 베를린이라는 도시로 기차를 타고 가는 것이었다. 베를린은 대도시라서 자정이 넘어도 집으로 가는 대중교통도 여전히 운행을 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래도 내가 살고 있는, 내가 알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두려움도 좀 덜 했고.
20시 30분에 출발 예정이던 기차는 어느새 22시까지 연착 시간이 늘어났다. 하하. 플랫폼 여기저기 산발되어 기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늘어나는 연착 시간을 보면서 한숨을 푹푹 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서로서로 안전해 보이는 승객들 근처로 은근슬쩍 모여들었다. 나도 어느 친절한 노부부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오늘 베를린 가는 길이 쉽지 않네’ , ‘날씨가 꽤 춥다’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사이 기차 연착 시간은 90분이 되었다가 갑자기 70분으로 줄어들더니, 올라탈 수 있는 플랫폼 번호가 거의 10분에 한 번씩 바뀌기 시작했다. 플랫폼 숫자가 바뀔 때마다 연착되는 기차를 기다리던 승객들은 우르르 우르르 대 이동을 해댔다. 이동하는 발자국과 또르르륵 끌리는 캐리어 사이 작은 욕설은 계속 들려왔고.
그렇게 세 번의 이동 끝에 온다 간다 말도 없이 기차가 뿅 나타났다. 원래 오기로 한 열차는 결국 고장 나 버리고 근처에 있던 다른 기차가 급하게 나타난 모양새였다. 원래 올라타야 하는 기차 번호와 너무 다른 번호를 당당하게 매달고는 <베를린행>이라고 쓰여 있는 기차. 그래서 우리들은 기차와 함께 나타난 직원에게 ‘이게 베를린에 가는 그 기차가 맞는지 ‘ 다 같이 몰려가서 물어봤다.
직원은 아주 낡고 지친 얼굴로 ‘이게 그 베를린에 가는 기차가 맞고, 곧 출발할 거니까 다들 타라‘고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기차에 올라타자마자 ‘휘리릭-’하는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 더리 바로 출발해 버렸다.
표를 확인하는 직원이 새로이 올라탄 승객들의 티겟을 다급하게 확인하면서 ‘베를린가지?’하고는 한번 더 구두 체크를 했다. 열명 남짓되는 승객들을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앉았고, 직원은 그런 승객을 지나쳐 가면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듯했다.
‘모두의 목적지는 베를린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속사포로 내뱉었다.
그러더니 잠시 뒤, 잔뜩 지친 다른 직원이 안내방송을 울렸다. ‘우리 열차는 중간에 있던 작은 역들을 지나쳐서 곧장 베를린으로 갈 겁니다. 최대한 빨리 달려보겠습니다.‘라는 이야기였다.
창 밖을 내다보니 쉭-쉭 하며 풍경이 빠르게 멀어져 간다. 종종 이용하던 기차와 달리 어째 풍경이 멀어지는 속도가 꽤 빠른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더니 다시 한번 치직치직-하면서 방송이 터졌다.
‘우리 열차는 베를린 다른 역에 들리지 않고 중앙역으로 바로 갑니다. 지금부터 약 20분 뒤에 도착 예정입니다.‘
중간에 들러야 하는 작은 역을 지나쳐서 수요가 많은 중앙역으로 바로 간다는 안내. 어차피 나야 원래 거기서 내릴 예정이었으니 상관은 없지만, 부쩍 서두르는 기세였다. 그러다 문득 DB어플을 보자 모든 의문이 풀렸다.
연착되는 기차의 보상은 어찌 됐든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간이 기준이다. 60분 이상부터 약간의 보상이 보장되는데, 작은 역을 지나쳐 바로 베를린 중앙역으로 도착하니 연착시간은 정확히 58분이었다.
근소한 2분 차이로 딜레이반은 승객들에게 보상의 의무를 벗어던졌다. 플랫폼에서 덜덜 떨며 기다린 시간이 이미 70분이었어서 당연히 보상을 받을 줄 알았건만 이렇게 60분 안쪽으로 목적지 도달 시간을 줄이다니.
약간의 허탈함과 놀라움 속에서 도착한 베를린 중앙역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똑같이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지독한 독일 명물 도이치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