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나를 책임져주지 않는 시대, 그래서 나는 나를 책임지기로 했다
요즘 나의 하루는 아침부터 과속 중이다. 눈을 뜨기도 전, 오늘 처리해야 할 업무와 일정이 머릿속을 점령한다. 정신은 이미 10시 회의실에 가 있고, 감정은 아직 잠에서 못 깬 채 떠밀려 간다. 커피를 줄여봤다. 투샷에서 원샷으로. 혹시나 이 떨리는 가슴과 요동치는 생각이 카페인의 영향은 아닐까 싶어서. 하지만 하루는 여전히 빠르게 흐르고, 머리는 더 빠르게 달린다. 커피를 줄인다고 삶이 줄어들 리 없다. 오히려 덜 각성된 몸으로 더 많은 일을 버티게 된다.
한때 커피는 나에게 여유였다. 커피잔 위로 피어오르던 김처럼, 짧은 숨 고르기를 허락하던 유일한 사치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마저도 또 하나의 연료다. 나를 각성시키고, 버티게 하고, 다시 달리게 만드는 ‘업무용 부스터’일 뿐. 그렇게 나는 나를 계속 밀어붙인다. 이 속도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브레이크를 나는 스스로 고장 내며 살아간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 마하트마 간디
밤이 오면 원래 몸과 마음은 쉬어야 한다. 하지만 요즘 내 밤은 더 힘들다. 몸은 지쳐 있는데 정신은 각성되어 있다. 눕지만 뒤척이고, 눈을 감아도 머리는 돌아간다. 수면유도제를 먹어도 얕은 잠을 자고, 새벽이면 다시 깬다. 불이 꺼진 방 안에서 꺼지지 않는 생각은 고요 속의 폭풍처럼 몰아친다. 밤에도 멈추지 않는 업무, 사람, 대화, 불안, 미래. 나는 지금 셧다운되지 않는 인간이다.
현대인들 대부분이 이 밤의 고통을 안다. 직장인은 일을, 주부는 가정을, 퇴직자는 상실을, 청년은 불확실한 내일을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잠들기 전에 깨어 있는 마음과 싸운다. 스위치를 꺼야 하는데, 손이 떨려 꺼지지 않는다. 진짜 필요한 건 휴식이 아니라, 일상을 정리하고 멈출 수 있는 내면의 여유다. 밤은 하루의 끝이 아니라,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잠들기 전 가장 많이 떠올리는 것이, 우리가 정말로 고민하는 것의 정체다.”
— 알랭 드 보통
6년간 나는 매번 낯선 자리에서 일했다. 누군가는 내게 “적응을 잘한다”, “일을 빠르게 배운다” 말했지만, 그건 익숙한 척을 잘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실제로는 매번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남들보다 더 일찍 출근해 매뉴얼을 공부하고, 계획서를 새로 쓰고, 선배의 자료를 하나하나 복기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일 잘하는 사람’이 되었고, 더 많은 일을 맡게 되었다. 결국, 책임은 성실한 사람에게 몰린다.
하지만 그렇게 누적된 ‘능숙함’은 곧 무게가 된다. 일을 맡기면 잘하니까, 계속 맡겨진다. ‘일을 잘해서’라는 칭찬은 어느새 ‘이 사람은 무조건 해낼 거야’라는 부담으로 변한다. 사람들은 그 이면의 피로와 고통을 보지 못한다. 그러다 문득, ‘나는 지금 뭘 위해 이렇게까지 버티고 있지?’라는 질문 앞에 멈춰 선다. 그리고 답이 없다면, 그건 무너짐의 신호다.
출근부터 퇴근까지, 그리고 퇴근 이후의 회신, 정리, 계획. 그 사이에 ‘나’라는 존재는 점점 사라진다. 가족과 있어도 머리는 회의 내용을 복기하고,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도 보고서의 문장이 겹쳐진다. 이 삶은 너무 조밀하다. 숨 쉴 틈이 없다. 일과 성과에 집중할수록 내 삶의 서사는 흐릿해진다. 하루를 열심히 살고도, 오늘을 살았다는 감각은 없다.
회사에서든, 집안일이든, 사람들은 묻는다. “오늘 뭐 했어?”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너무 많은 걸 했지만, 정작 나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이 질문은 곧 자기를 향한 질문이다. ‘오늘 나는 나에게 무엇을 해줬는가?’ 이 질문 앞에 당당할 수 있는 날은 얼마나 될까. 너무 많아진 ‘해야 할 일’ 사이에서, ‘하고 싶은 일’은 숨을 곳조차 없다.
아이의 키가 어느새 나보다 커졌다. 목소리는 낮아지고, 말투는 어른스러워졌다. 함께 밥을 먹지만 대화는 줄었다. 옆에 있지만 마음이 다가가지 못한다. 아내와는 여전히 같은 집에 있지만, 생활의 리듬은 어긋나 있다. 부모님 얼굴을 보면 늘어난 주름이 눈에 띈다. 어릴 땐 그 얼굴이 나를 안심시켰지만, 이제는 그 얼굴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가족은 늘 곁에 있었지만, 나는 자주 곁에 없었다. 항상 ‘지금은 바쁘니까, 다음에’라며 시간을 미뤘다. 하지만 다음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가고,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직장인도, 주부도, 퇴직을 앞둔 사람도 다 똑같다. 우리는 가족을 ‘챙기고 있다’고 믿지만, 정작 그 시간은 마음 없이 스쳐갈 때가 많다. 이제는 그 공백을 채우고 싶다. 무언가를 더 하려는 게 아니라, 함께 있는 시간을 제대로 살고 싶다.
요즘 나는 글을 쓴다. 누군가는 취미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에겐 생존이다. 나를 되살리는 작업이다. 하루를 돌아보고, 나를 들여다보고, 지나간 감정을 마주하는 시간. 학창시절 품었던 문학청년의 감성이 다시 피어난다. 글을 쓰면서 나는 나와 다시 친해진다. 오랜만에 대화하는 친구처럼.
글을 쓰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지는 존재’라는 것. 회사에서는 내 성과만 남고, 집에서는 내 역할만 남는다. 그 틈에서 진짜 나는 점점 옅어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록한다. 나의 감정, 나의 의심, 나의 기쁨, 나의 후회. 글은 거창한 언어가 아니라, 진짜 나의 숨결로 채워진 일기장이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을 글로 써 내려가는 것이다.” — 조앤 디디온
요즘 50대 퇴직자들의 유튜브를 자주 본다. 그들의 공통점은, 퇴직 후 자기를 잃었다는 것이다. 회사에서는 인정받았지만, 회사 밖에서는 아무도 자신을 불러주지 않았다. 오롯이 혼자 남은 그 시간. 그들은 말한다.
“일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다.”
“사람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 모르겠다.”
“쉬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이 말들에서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동시에 각성한다. 나도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그들과 다르지 않을 거라고.
퇴직은 갑자기 오는 게 아니다. 천천히 다가오고, 어느 날 내 앞에 선다. 그때 나는 어떤 얼굴로 맞이할 것인가. 내 이름이 아닌, 직함으로 살아온 시간은 퇴직과 함께 끝난다. 그 이후에도 나는 나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부터 삶의 우선순위를 바꿔야 한다. 일 중심이 아니라, 나 중심으로. 성과 중심이 아니라, 관계 중심으로. 결국,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한다.
“아무도 나를 책임져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내가 나를 책임지기로 했다.”
2025. 7. 16.(수) 별의별 교육연구소 김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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