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닿지 않는 시대, 그래도 우리는 말을 건넨다.
오늘 교육부 회의 때문에 서울까지 다녀왔다. 왕복 네 시간. 멀다.
2시간 넘게 지하철을 타고, 오랜만에 내린 서울역은 낯설었다.
길을 헤매다 가까운 맥도날드에 들어가니,
사람이 붐볐다. 키오스크 여섯 대가 쉴 틈 없이 돌아가고,
자리를 못 찾아 서서 햄버거를 먹었다.
옆에는 외국인들이, 뒤에는 무거운 짐을 든 여행객들이 서 있었다.
실버 일자리로 나온 듯한 노인이
조심스레 테이블을 닦고, 트레이를 치우고 있었다.
그 풍경이 10년 전 일본에서 본 장면과 겹쳤다.
그때도 편의점과 가게마다 노인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느꼈던 약간의 씁쓸함과 안쓰러움이 오늘 서울역에서도
묘하게 데자뷔처럼 올라왔다.
누군가는 노후에도 일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좋은 현상’이라고 말하겠지만,
그 속에는 각자 버티고 살아내야 하는 사회의 냉정함이 깔려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문득, 오늘 회의에서 나누었던 ‘소통’이라는 단어가
햄버거 냄새 속에서 다시 떠올랐다.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서로 이해하고 말이 통하는 게 어려운 걸까?
회의실에서나 햄버거 가게에서나,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내가 처음 교직에 발령받았을 때가 떠올랐다.
신규 교사는 학년과 업무 배정을 받기 전에 ‘희망서’를 내야 한다며
선배들은 말했다. 그런데 그들은 이렇게 덧붙였다.
“그냥 빈 종이로 내. 그게 관례야.”
나는 그대로 따라 했다. 마음 한켠에서 부당하다고 느끼면서도,
관례라는 말에, 모두가 그렇게 해왔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순리’라 여겼다.
돌이켜보면, 그때부터 내 말문은 조금씩 닫혀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삼키고, 부당함을 느껴도 조용히 넘어가고.
그게 조직을 지키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세대들은 다르다.
부당하다고 느끼면 말을 한다.
대기업에서 성과급을 불공정하게 나눴다고,
젊은 직원들이 내부 사내망에 문제를 제기했다는 뉴스를 보며,
나는 왜 그때 그러지 못했을까 고민했다.
내가 ‘소통’이라고 믿었던 건 사실 침묵과 순응이었던 건 아닐까?
오늘 교육부 회의에서도 사실 입을 다물 수 있었다.
이제 곧 학교로 발령받아 교육청을 떠날 예정이었고,
남은 동료들에게 괜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6년 동안 쌓인 답답함이, 더는 참지 못하게 했다.
현장의 어려움, 말은 하지만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
그런 걸 듣기만 하고 고개만 끄덕이고 돌아가는 일이
너무 버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오늘은 말을 했다.
듣는 사람에 따라 불편할 수도 있는 얘기였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했다.
회의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후련함보다는 묘한 아쉬움이 남았다.
내가 한 말이 누군가를 상처 주지 않았을까?
그리고 과연 내 말이 진짜 ‘소통’이었을까?
혹시 나도 결국 내 생각만 강하게 밀어붙인 건 아닐까?
회의를 다니면서 늘 느낀다.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 ‘소통’을 외치지만,
현실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제한된 예산, 부서 간 입장 차이, 현실적인 제약.
서로를 이해하려고 모인 자리에서 결국 확인되는 건
‘차이’뿐이다.
누군가가 말한다. “그래도 민주주의가 정착됐잖아.”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거대한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자리 잡았을지 몰라도,
일상의 민주주의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우리는 쉽게 권위와 일방통행의 말에 기대어 산다.
이 작은 공간에서조차 말이 닿지 않는데,
어떻게 큰 사회에서 정의와 신뢰가 바로 서겠는가?
소통은 기술이자 용기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도 생각한다.
소통은 ‘시간’이기도 하다.
서로의 입장을 들으면서 화를 누그러뜨릴 시간,
내가 한 말을 후회하고 다시 다듬을 시간,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간 말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 시간을 잘 주지 않는다는 거다.
회의에서도 빠른 결론을 원한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빨리’ 대답하길 원한다.
빨리 사과하고, 빨리 수긍하고, 빨리 잊으라고.
그러니 말은 오가지만 마음은 닿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성급하고, 너무 불안하다.
대화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이해다.
우리는 종종 말로 상대를 ‘이기려’ 한다.
내가 옳다는 걸 증명하려고, 나만 상처받지 않으려고.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서로 멀어질 뿐이다.
오늘 내가 한 말도 아마 완벽하지 않았을 거다.
듣는 사람을 100% 이해시킬 수도 없었을 거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불완전한 말이라도, 불편할 수 있는 대화라도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걸.
그게 우리가 소통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서울역에서 먹던 햄버거의 맛은 금방 잊었지만,
그때 느낀 묘한 외로움은 아직 남아 있다.
사람들로 붐비는 역 한복판에서도,
우리는 서로 말이 닿지 않아 외롭다.
회의실에서도,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을 건네야 한다.
서툴더라도, 상처를 남길까 두렵더라도.
그 시도가 쌓여야 언젠가는 벽이 조금씩 낮아질 테니까.
소통은 결국 기술이 아니라 ‘희망’이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려는 의지,
그걸 포기하지 않는 마음 말이다.
2025. 7. 29.(화) 별의별 교육연구소 김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