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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와 불고기 전골, 그리고 미루면 늦는 사랑

연로한 부모님과의 여행에서 깨달은 시간, 사랑, 그리고 나를 돌아보는 법

여행을 준비하는 마음은 언제나 설렘과 기대를 품게 하지만, 이번 강원도 여행은 조금 달랐다. 짐을 싸는 손길은 무겁고, 마음속에는 오래 미뤄둔 숙제를 풀어야 한다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발령과 함께 찾아온 몸의 피로, 그리고 연로하신 부모님의 건강이 그 숙제의 이름이었다. 언젠가 모시고 가야지, 상황이 나아지면 함께해야지 하며 뒤로 미뤄왔던 시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언젠가’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일과 계획, 사소한 이유들이 ‘지금’을 가로막았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사랑은 언제나 당장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이번 여행은 그래서 단순한 휴가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 깊이 묻어둔 이야기와 마주하는 시간이 될 것임을 예감했다.


발령과 강원도 여행 사이에서, ‘적당한 때’는 없다.

6년간의 장학사 생활을 마무리하며 학교 교감 발령을 받은 지 이틀, 나는 강원도로 향했다.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설렘과 각오로 가득 찰 줄 알았는데, 몸과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무거웠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탓인지, 전날 하루 종일 병원과 약국을 전전했다. 그나마 형이 운전을 맡아주었고,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길에 올랐다. 네 식구가 함께 여행을 가는 건 손에 꼽을 만큼 드문 일이다. 직장인의 삶은 늘 ‘이 일이 끝나면, 바쁘지 않을 때, 상황이 나아지면’이라는 조건을 붙인다. 하지만 그 ‘적당한 때’는 스스로 만들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 이번 여행길에 오르며 나는 깨달았다. 중요한 사람과의 시간은 언제나 급한 일보다 먼저여야 한다는 것을.


평창 한우와 양보의 자리, 사랑은 먹는 순서로도 드러난다.

여행 첫날 저녁, 평창의 한 한우집에 들렀다. 아버지는 계산대 앞에서 “마음껏 먹어라” 하시며 고기를 넉넉히 주문하셨다. 그러나 막상 본인은 불고기 전골만 드셨다. 형과 내가 먹는 접시 위에는 잘 구워진 한우가 가득했지만, 아버지 접시에는 고기 몇 점조차 없었다. 나이가 들어 예전처럼 많이 먹지 못함에도, 부모님의 마음을 알기에 평소보다 더 많이 먹었다. 부모의 사랑은 이런 것이다. 더 좋은 것을 자식에게 먼저 주고, 자신은 남은 것으로 만족하는 마음. 40대 후반이 된 지금도 부모님 눈에는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꼭꼭 씹어라, 골고루 먹어라, 운전 조심해라”라는 말은 더 이상 잔소리가 아니라 세월이 만든,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축복처럼 들렸다.


미루던 여행, 놓칠 뻔한 순간, 급한 일과 중요한 일

이번 여행은 사실 몇 년째 미뤄졌다. 코로나 시절에는 여건이 안 됐고, 최근에는 아버지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마음이 무거웠다. 마음 같아서는 9월 발령 후, 몸과 마음을 추스른 뒤 모시고 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적당한 때’를 기다리다 보면 평생 못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해야 할 일들을 잠시 뒤로 미루고, 이번 여행을 택했다. 직장인은 늘 선택의 기로에 선다. 당장 급한 일과 정말 중요한 일 중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 대부분 우리는 급한 일을 먼저 처리하느라 중요한 일을 미루고, 그 대가를 후회로 치른다. 부모님과의 시간은 숫자로 기록되지 않고, 성과 보고서에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장 후회하는 것은 ‘하지 못한 일’이 아니라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다.


바다와 컵라면, 그리고 사라진 명소, 사라지는 것은 장소만이 아니다.

어릴 적 여름, 우리 가족은 텐트 하나 들고 동해바다로 향했다. 컵라면 하나로도 행복했고, 정동진은 우리 가족만의 숨은 명소였다. 그 시절의 정동진은 조용했다. 기찻길 옆 바다에는 사람보다 바람이 많았고, 모래사장에서는 시간이 멈춘 듯 놀 수 있었다. 그러나 몇 해 뒤 다시 가보니, 발 씻는 물에도 돈을 내야 하고,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그때의 여유는 사라졌다. 우리는 그곳을 다시 가지 않았다. 이 변화는 바닷가 풍경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관계도, 사람도, 기회도 언젠가 변한다.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모습은 영원히 그대로 있지 않다. 부모님과 함께한 그 시절의 여름처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순간이 있음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그래서 지금 느끼는 따뜻함과 소중함은 그 자리에서 꼭 붙잡아야 한다.


공부하란 말 대신 건넨 신뢰, 기다림이 주는 힘

부모님은 단 한 번도 나와 형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성적표를 보며 한숨을 쉬거나, 다른 아이와 비교하는 일도 없었다. 나는 전교 상위권에서 학급 중위권으로 떨어지기도 했고, 무협지에 빠져 만화방에서 살던 시절도 있었으며, 고등학교 때 큰 병을 앓아 부모님의 마음을 졸이게 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부모님은 기다려주셨다. 그 기다림은 나를 죄책감이 아니라 책임감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나는 내 아이들에게 그러지 못했다. “공부 안 하면 고생한다”는 말, 그리고 내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를 들려주는 ‘라떼 아빠’가 되어 있었다. 부모님의 사랑은 기다림과 신뢰였는데, 나는 성급하게 결과를 재촉했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부모님의 방식을 다시 배우기로 했다. 기다려 주는 것, 믿어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깊은 사랑이라는 것을.


시간과 사랑에 대한 결심, 지금이 가장 좋은 때

철학자 하이데거는 “죽음을 사유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삶을 산다”고 했다. 죽음을 의식하면, 무엇이 중요한지 분명해지고, 불필요한 욕심이 걸러진다. 나는 그동안 ‘급한 일’을 하느라 ‘중요한 일’을 미뤄왔다. 교육청에서 밤늦게까지 마무리하던 업무들이 과연 내 인생에서 본질적인 것이었을까. 시간은 유한하고, 되돌릴 수 없으며,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른다. 죽음이 언제 올지 모르는 이 삶 속에서,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나는 누구와 시간을 보내고, 무엇을 말할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부모님의 흰 머리와 느려진 걸음을 보며 나는 다짐했다. 교감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것만큼, 아들로서의 도리, 아버지로서의 역할도 놓치지 않겠다고. 부모님께 받은 신뢰와 사랑을 내 아이들에게도 전하며, 가정을 잘 지켜나가겠다고. 사랑은 미루면 늦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부터 실천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나의 삶을 완성시킬 것이다.


강원의 밤은 조용했고,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오래된 사랑의 얼굴을 보았다. 부모님은 여전히 더 좋은 것을 자식에게 먼저 주셨고, 나는 그 사랑을 아직 온전히 갚지 못한 채 살아왔다. 하지만 사랑은 계산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 흘려보내는 것임을 이제야 알겠다. 부모님께 받은 믿음과 기다림을 내 아이들에게 전하며, 가정을 단단히 지켜 나가고 싶다. 그 사랑이 내 삶과 아이들의 삶 속에 오래도록 살아있게 하고 싶다.


사랑은, 지금 당장 표현해야 한다. 그 순간을 놓치면 두 번 다시 같은 장면은 오지 않는다. 평창 한우집에서 불고기 전골을 드시던 아버지의 모습처럼, 사소해 보이지만 평생 마음속에 남는 장면은 우리가 미루지 않은 사랑에서 온다. 그리고 그 사랑이야말로, 죽음 앞에서도 후회하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힘이다.


2025. 8. 10. 별의별 교육연구소 김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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