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보다 기다림을 배우며, 완벽 대신 과정을 선택하기까지
돌이켜 보면 나는 오랫동안 ‘증명’이라는 이름의 보이지 않는 레일 위를 달려왔다.
학창시절 성적을 잘 받아야 했던 것도, 남들 앞에서 보이기 좋은 직업을 얻어야 했던 것도, 결혼을 통해 사회적으로 안정된 틀 안에 들어가야 했던 것도, 그리고 집과 차를 마련해 남들에게 부족하지 않다는 시그널을 보여주어야 했던 것도 결국은 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행위였다.
그 속에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안과 결핍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나는 잘할 수 있어. 나는 뛰어난 사람이야.”라는 다짐을 반복했고, 그 다짐이 어느 순간 삶의 방향을 지배했다.
겉으로는 성실하고 단단해 보였지만, 사실은 타인의 눈길과 평가에 취약한 사람이었다. 증명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마음은 늘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고, 내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왜곡시켰다.
최근 방학을 맞아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둘째가 운동 경기에 출전해 좋은 활약을 보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무척 기뻤다. 그래서 “아빠는 운동을 못하는데 너는 정말 대단하다”, “다른 학교와 경기에서 골을 넣다니 훌륭하다” 같은 칭찬을 쏟아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마음이 걸렸다. 왜냐하면 그 칭찬 속에는 내가 학창시절부터 겪었던 무의식적인 패턴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적 누군가의 칭찬을 받으며 스스로를 ‘그런 사람’, 즉 뭐든 잘하는 사람, 완벽한 사람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그 규정이 무거운 짐이 되어, 늘 잘해야만 하는 사람, 실수하면 무너지는 사람이 되었다.
아이 역시 마찬가지다. 정체성과 자존감이 충분히 단단히 형성되지 않은 시기에 과도한 칭찬을 받으면, 아이는 자기 기준을 스스로에게서 찾지 못하고 바깥에서 찾게 된다.
칭찬을 받기 위해 행동을 고르고, 칭찬이 멈추면 기가 꺾이고 주눅이 든다. 그것은 일종의 ‘칭찬 중독’이며, 모범생 컴플렉스 혹은 착한아이 콤플렉스라고 부를 만하다.
결국 칭찬은 달콤한 약처럼 느껴지지만 동시에 아이의 삶을 ‘타인의 시선’이라는 굴레에 가두는 독이 될 수도 있다.
돌아보면 나는 언제나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높은 잣대를 들이대고, 실수에 대해선 끝없이 자신을 책망해왔다.
성취를 하더라도 그것이 완벽하지 않다고 느끼면 남들에게 보여주지 못했고, 그래서 공부도, 운동도, 취미생활도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철저히 감췄다.
남 앞에서 말하는 것조차 큰 부담이었다. 내 생각이 부족해 보이지 않을까, 누군가의 공격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늘 따라다녔다.
어렵게 시작했던 유튜브 채널에서도 댓글을 닫아 놓았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누군가의 비판 한마디에 내가 통째로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변화를 경험했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나는 잘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매일 글을 쓰는 사람이다”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붙잡게 된 것이다.
댓글을 열어 두고, 낯선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평가보다는 과정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완벽주의가 만들어낸 껍질을 벗기자 비로소 관계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타인의 시선보다 나 자신의 목소리를 더 뚜렷하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교육청에 있다 보면 요즘 사회문제로 떠오르는 ‘은둔청년’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한 노부부의 얼굴에 드리운 미묘한 근심을 떠올린다. 집에는 장성한 아들이 있지만 직업도, 연애도, 친구도 없이 방 안에서만 생활한다고 했다.
그들의 표정에는 깊은 걱정이 배어 있었다. 사실 나는 그 청년과 나 자신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늘 높은 기준으로 나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치켜세우려 애쓰지만, 동시에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스스로를 끝없이 몰아붙인다.
결과적으로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며,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해 숨고 싶어질 때가 많았다. 그것은 어쩌면 은둔청년들이 겪는 내면의 고통과 같은 결을 가진다.
우리 사회는 늘 ‘보여주기 위한 삶’을 강요한다. 증명과 평가의 연속 속에서 사람들은 쉽게 지치고, 방 안에서 문을 닫아버린다.
“비교는 기쁨의 도둑이다.” 루스벌트의 이 말처럼,
끝없는 비교가 결국 기쁨을 빼앗고 삶을 마르게 만든다.
그래서 요즘의 결론은 분명해졌다. 칭찬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결과만을 찬양하는 칭찬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아이가 성공했을 때 박수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가 도전하는 순간부터 곁에 있어주는 일이다.
실패했을 때 “괜찮아”라고 말해주고, 다시 일어날 때 함께 걸어주는 일이다. 부모가 먼저 실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서는 장면을 아이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삶은 늘 실패와 성공이 엇갈리고, 그 안에서 사람이 단련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몸으로 알려줘야 한다. 칭찬은 짧은 쾌감을 주지만 기다림은 긴 성장을 준다. 칭찬은 순간의 빛을 주지만, 함께하는 시행착오는 평생의 불빛을 키운다.
결국 우리는 아이를 칭찬으로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목격해 주는 동행으로 키워내야 한다.
며칠간은 글을 쓰기 어려웠다. 몸과 마음이 동시에 방전된 듯 느껴졌고, 충전이 잘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새벽에 잠에서 깨어 약간의 에너지를 되찾았을 때, 나는 다시 글을 쓰기로 했다.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내 마음을 브런치에 기록하면서 조금씩 회복을 경험했다.
거창한 변화를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하루에 한 번 산책을 하고, 한 문단의 글을 쓰고, 짧은 대화를 나누는 작은 루틴이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그것이 곧 증명의 삶에서 경험의 삶으로 천천히 이동하는 출발점이 된다.
마지막으로 나는 ‘하고 싶은 일’의 목록 대신 ‘하지 않을 일’의 목록을 써내려 가고 있다.
1. 타인의 시선을 기준으로 나를 평가하지 않기
2. 결과만을 칭찬하고 과정을 지나치는 말버릇 고치기
3. 완벽하지 않으면 감추는 습관 버리기
4. 두려움 때문에 대화를 닫아버리지 않기
이 네 가지는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 내 삶을 바꾸는 가장 중요한 다짐이다.
세상이 끊임없이 다른 무엇이 되라 요구할 때,
나 자신으로 남는 일은 가장 큰 성취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제 외부의 증명보다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다.
증명은 외부 무대에서 끝나지만, 성장은 내부의 방에서 시작된다.
이제 나는 아이와 나 자신을 향해 이렇게 속삭인다.
“잘하려고 애쓰기보다, 살아보며 배우자.”
그 말 한마디가 내 삶의 태도를 바꾸고, 조금은 더 단단한 내일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2025. 8. 18.(월) 별의별 교육연구소 김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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