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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에서 배운 것, 아이를 ‘잘’ 키운다는 환상 너머

준비는 했지만, 말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내가 처음 TV에 출연했을 때,
솔직히 말하면 꽤 부담스러웠다.
교사로서, 교육행정가로서, 또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로서
누군가에게 ‘정답’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해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했다.
학자들의 이론을 찾아 읽고, 교육 심리학 책을 정독했다.
뉴스 기사, 논문, 전문가 칼럼을 스크랩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 애썼다.
방송용 Q시트도 만들고, 멘트도 정리하고,
결국은 철저하게 ‘준비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방송을 마친 후 돌아보니
내가 했던 말들이 내 언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어딘가에서 빌려온 문장들,
누군가의 통찰을 흉내 낸 주장들,
그 안에 내가 없었다.


두 번째 방송, 나의 언어를 찾아서

그래서 두 번째 출연에서는 마음을 바꿨다.
이번에는 ‘공부한 말’이 아니라,
‘내가 믿는 말’을 해보자.
교육 이론도, 심리학자 이름도,
요즘 화제가 되는 책도 잠시 내려놓았다.

대신 아이들을 매일 만나며 느꼈던 것,
학부모와 상담하면서 들었던 고민,
그리고 나 자신의 자녀를 키우며 마주했던
불안과 후회, 그리고 작지만 소중한 깨달음을 꺼내놓았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나는 누군가의 기준을 만족시키기보다
내가 품고 있던 고민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춘기, 고치거나 없애야 할 문제가 아니다

많은 부모님들은 사춘기를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이의 말투가 달라지고, 예민해지고,
말을 듣지 않고, 친구와 더 가까워지고,
어디서 배웠는지도 모를 말들로 부모에게 상처를 준다.

그래서일까?
이번 방송에서도 기획자나 작가 분들이 바랐던 건
‘사춘기를 빠르게 지나갈 수 있는 팁’
‘아이의 반항을 잠재우는 말 한마디’
‘가족 관계가 좋아지는 매직 솔루션’ 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 의문이 들었다.
정말 그런 마법이 존재할까?
존재해야만 하는 걸까?

사춘기는 고쳐야 할 병이 아니라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누군가의 자식이 아닌,
‘나’로서 살아가기 위한 통과의례다.
그 통증 없이, 그 혼란 없이
사람은 어른이 될 수 없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과잉

방송 중 한 가지 주제는
‘부모의 욕심’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아이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배우는 것도.
내가 겪었던 아쉬움과 고생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
그래서 자꾸 ‘더 좋은 것, 더 많이’를 향해 달려간다.

하지만 그게 욕심인지, 사랑인지,
혼동하게 될 때가 많다.
내가 원하는 삶을 아이에게 대신 살아달라고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틀’ 안에 아이를 가두고 있는 건 아닌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녀의 일상과 감정을 점검하고,
성적을 기준 삼아 인정을 주고,
친구 관계에까지 간섭하게 될 때,
그 사랑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그 모든 간섭은 결국
“너는 나와 떨어져선 살아갈 수 없어”
라는 무의식적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다.


자녀의 독립, 부모의 손끝에서 시작된다

방송을 하며 이런 말도 했다.
“부모가 자녀를 심리적으로 놓아줘야,
아이도 진짜 자립할 수 있다.”

문제는… 그게 참 어렵다는 것이다.
내가 잡고 있던 손을 놓는다는 건
아이를 믿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을 믿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자녀를 성인으로 인정하지 못한다.
스무 살이 되어도,
대학생이 되어도,
직장을 다녀도,
부모는 자녀를 어린애처럼 바라본다.
그게 사랑이라고 착각하면서.


지연된 사춘기, 지연된 독립

요즘은 사춘기가 중학생 때 오는 게 아니라
대학교 가서 오기도 하고
직장인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찾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요즘 청년들이 ‘자기 결정’을 어려워하고
관계에서 극단적인 감정기복을 겪으며
사회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나는 이것이 부모 세대가 아이의 성장 시계를 붙잡아놓은 결과라고도 생각한다.
더 나중에 독립하고, 더 늦게 실수하고,
그래서 더 오랫동안 방황하는 시대.
그 시작은, 어쩌면 우리가 사춘기를 문제 삼았던 그 시절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방송은 교실 밖 또 다른 교실이었다

방송국은 생각보다 조용했고
그 안에 수많은 역할들이 있었다.
작가, 피디, 아나운서, 감독, 스태프…
모두가 자신만의 루틴과 감각으로
한 편의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었다.

그들과 대화하며
나는 교실 바깥에서 또 다른 수업을 받는 기분이었다.
‘이야기를 어떻게 전할 것인가’
‘진심은 어떻게 전달되는가’
‘공감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그 모든 것이 교육이었다.
나를 확장시키는 배움의 시간이었다.



너무 잘하려는 마음, 내려놓기

방송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이상하게도 마음이 복잡했다.

‘조금 더 잘 말할 수 있었는데.’
‘그 장면에서는 저런 말보다 이런 말이었어야 했는데.’
‘더 감동적으로, 더 명확하게…’

하지만 그런 생각이
어쩌면 내가 처음 방송에서 실수했던
‘너무 잘하려는 욕심’과 닮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완벽하려 하지 말자.
솔직하자.
내가 진심으로 고민했던 것들을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되자.


다시 학교로, 아이들의 웃음 속으로

학교에 돌아와 아이들의 등교를 맞이한다.
웃으며 인사하고,
교문 앞에서 장난치는 아이들을 보며
마음이 맑아진다.

현장은 언제나 거칠고 바쁘다.
민원도 있고, 업무도 있고,
때로는 버거운 갈등도 있지만
아이들과 함께 웃을 수 있다는 것,
그게 내가 교감으로서 존재하는 이유다.


다음엔 더 나다운 방송을

다음에 또 방송 기회가 생긴다면
이번의 시행착오, 아쉬움, 깨달음을
고스란히 안고 나가고 싶다.

나는 전문 방송인이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 매일 무대에 서는 교육자다.

그리고 그 무대 위에서
진심을 담아 말하고,
나의 언어로 질문하고,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울림을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덧붙이며

나는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 마음의 이야기를 더듬어 전하고 싶다.

TV 앞에 선 내 모습도,
교문 앞에 선 내 모습도
모두 내가 걸어가는 성장기의 한 장면일 뿐이다.


2025년 9월 8일 월요일 별의별 교육연구소 김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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