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문에 나는 운이 좋다고 생각해 “
B는 현재까지의 연구 분야 진행상황 및 금융에 대해 얘기를 마친 참이었다.
전력질주를 해도 항상 제시간에 오는 버스를 타지 못할 것을 안 지금, 나는 연구실에서 혼자 연구노트를 작성 중이던 선배 B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의 주제는 학업과 진로를 벗어나 다음 챕터인 연인 이야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좋은 음식을 먹었을 때 미각으로 그 음식이 의미하는 바를 헤아리듯이, 챕터를 넘어가며 B와 나는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가져갔다. 나는 눈을 감고 지금 이 상황을 음미하느라 B의 행동을 살펴볼 겨를이 없었지만, 아마 B도 나처럼 이 순간을 곱씹고 있었으리라.
시간이 흐른 후 내가 먼저 운을 띄웠다.
“ 대학원을 가지 않고 바로 취업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제 목표가 30살 이전에 결혼하는 것이라서 그래요. “
B가 여친과의 장기연애를 하는 것이 내심 부러워 나온 말이었다. 결혼을 이 사람이랑 하겠지 하는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아니, 진지하게 결혼에 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B의 현 위치가 부러웠다.
” 너 그거 저번에 말했던 것 기억난다. “
아마 회식자리에서 술기운에 말했겠지. 속으로 생각했다. 현재 술은 마시지 않았어도 서로의 이야기꽃으로 주변의 공기 온도는 올라간 상태였다. 지금 여기가 그리스 아고라인지 착각이 날 정도였다. 이로 인해 취기가 없어도 진솔된 이야기가 나온 것이지 않을까.
B가 대화를 이어갔다.
“ 지금 내 여친이 용인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잖아. 기숙사에서 여친이 동네를 온다고 할 때 까치울역까지 가서 항상 기다려. 근데 나는 이런 면을 아빠한테 배운 것 같아. 우리 엄마가 오후 11시에 퇴근을 하는 날이면 회사일로 피곤하실 텐데 아빠는 항상 차로 엄마를 태우러 가시거든. “
놀랐다. B가 평소 좋아하는 농구까지 제쳐두고 내가 아끼는 사람을 위해 그날 약속을 잡지 않는다는 점. 집까지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추억이 모이면 얼마나 큰 감동으로 다가올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말을 하고 머리를 쓸어 넘기는 B의 약지에 끼어있는 은반지가 더욱 빛나보였다.
또한 나는 살면서 아빠와 나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깊은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B의 이야기를 들으며 도대체 나는 아빠와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려던 참…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어느덧 이야기는 에우리피데스의 Deus Ex Macina가 나올 차례였다.
“ 형 저 버스가 온다고 해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
이미 5대의 버스를 보낸 상태였다.
” 그래 나중에 소주 마시면서 진하게 얘기하자. 좋은 시간이었어 진짜. “
가벼운 인사를 하고 건물을 나오니,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 아끼는 회색 옷을 알게 모르게 적시고 있었다. 옷을 신경 쓸 겨를이 아니었다. 왜? 대화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류장을 걸어가며 아빠와 나의 공통점을 생각하는 한편, 속으로 B에게 하지 못한 말을 되뇌었다.
‘오늘 뜻밖의 상황에 뜻밖의 인물과 뜻밖의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네요. 마음에 쌓인 고민도 좀 덜 수 있었고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저는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