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고 밤이 되면 사람들은 씻고 잘 준비를 한다. 하지만 나와 내 친구들의 밤은 새로운 시작이라 정의할 수 있다. 초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우리의 단톡방에는 운을 띄우는 친구가 존재한다.
"오늘 술 먹을 사람"
우리는 주말마다 한 번씩 만나는데, 항상 운을 띄우는 사람은 달라진다. 대부분 마시기 싫은 친구들은 가볍게 읽은 후 답장도 하지 않지만, 운을 띄운 친구와 뜻이 맞는 사람은 답장을 한다.
"ㄱㄱ"
마치 오징어게임의 팀 정하기처럼 이러한 번개모임의 구성원은 자연스럽게 정해진다.
사실 술을 마신다는 개념은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기쁘거나 행복한 상태에서 술을 마실 때도 있고, 어떤 이들은 우울하고 화나서 술을 마실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유 없이 그냥 마신다. 단순히 술이 좋아서 마시는. 술 템포나 주량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어려서부터 함께 술을 마셔서 그런지 템포나 주량이 거의 비슷하다. 물론 그중에서 내가 제일 못 마시지만.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핸드폰을 보고 있다 보면 약속 시간이 다가온다. 눈 깜빡한 사이 턱밑까지 쫓아온 시간을 확인한 나는 마음속으로 일어나겠다는 다짐을 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너무 춥지만 않을 정도로 옷을 입고, 삼선슬리퍼를 신고 밖을 나오면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는 동네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진다. 이때부터 우리의 시간이 시작되는 것이다.
술을 마시러 가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오늘 가기로 한 술집은 15년 전부터 있던 호프집으로, 어릴 때 부모님과 손잡고 호프집을 몇 번 갔던 기억이 있는 추억의 장소다. 골목을 따라서 밑으로 걸어가다 보면 300m쯤 되는 거리부터 요란한 빨간색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시골 가로등에 모이는 각종 벌레들처럼 뭐에 홀린 듯이 빨간 간판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서 발걸음을 재촉한다. 나방이 이동하는 종착지의 끝은 알코올이다. 호프집 근처에 도착하니 우리보다 먼저 새로운 시작을 한 사람들이 보인다. 상기된 얼굴과 큰 데시벨로 대화를 하는 그들을 가만히 보면 각자에게서 희로애락이 다 느껴진다. 사람의 내면에 있는 본심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게 만드는 술이란 감정의 촉매제 역할을 담당한다고 생각한다.
술집으로 먼저 들어갔다. 끈적한 테이블에 기본안주로 뻥튀기가 나올 것 같은 술집을 충혈된 눈으로 이리저리 둘러본 결과, 오늘 같이 술을 마시기로 했던 Y는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술집 사장님은 외관상 60대쯤 된 것 같은 남성으로 호리호리한 몸매에 키가 크시고 자기 관리를 꾸준히 하시는 것 같았다. 수염은 기르지 않았지만 머리가 장발이라 말총머리로 머리를 묶고 바닥을 마대로 열심히 닦고 계셨다. 워낙 힘줘서 닦으시느라 묶은 머리가 예상되지 않는 방향으로 흔들리는 것을 보며 웃겼지만, 한편으로는 저렇게 본인의 업을 열정적으로 임하시는 모습이 새삼 대단했다. 찰나의 순간에 복합적인 감정이 들며 사장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사실 지난달에 Y와 나를 포함한 4명이서 이 술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처음 술집 문을 열기 전 창문으로 주 고객층이 4~50대인 것을 보고 발걸음을 망설였던 적이 있었다. 그때 사장님이 돌아가려는 우리를 보시고 호객행위를 하셔서 이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그때 우리가 젊어서 그런지 몰라도 안주를 하나 시키면 서비스로 안주 2개가 나오는 기적을 본 술집이라 우리는 그 술집에 좋은 마인드를 갖고 있었다. 사장님도 오랜만에 본 젊은 피가 반가웠었는지 술집에 들어와서 인사하는 나를 아는 채 하셨다.
"오랜만이네?"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사장님의 입에서 내 감정의 기류를 반전시키기에는 충분한 멘트가 흘러나왔다.
"근데 내가 내일 예식장을 가야 돼서.. 오늘 장사 접으려고 하는데 다음에 오면 안 될까?"
그때가 새벽 12시 30분으로, 늦은 시간이긴 했다. 실망한 나를 보면서 사장님도 아쉬워하는 눈치셨다.
"네 사장님. 다음에 다시 올게요. 안녕히 계세요."
어느 술집을 가야 하나 한 가지 고민을 얻은 채 술집을 나온 나는 멀리서 빠른 걸음으로 나에게 접근하는 Y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