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야간자율학습을 끝마치면 민수는 자신이 사는 달동네로 간다. 마땅히 마음에 맞는 친구도 없고 어른들이 취미를 가지라고 입이 닳도록 말해도 그럴싸한 취미도 갖고 있지 않은 민수였다. 그러나 민수는 남들보다 지구력 하나는 뛰어났다. 애들과 얼굴을 마주치는 것, 애들 눈을 마주 보며 말을 섞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민수는 야자가 끝나는 종소리가 울리면 제일 먼저 교문 밖으로 뛰어 나간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약 25분이 소요되며, 달동네로 올라가는 길의 경사는 매우 가파르지만 민수는 쉬지 않고 집까지 뛰어간다. 집에 가더라도 무료한 삶이 변하는 것도 아니고, 집에 가장 먼저 도착하라는 선생님의 명령을 받은 것도 아니지만 민수는 달리면서 자신의 잡생각들을 잠깐이나마 없앨 수 있다는 것이 좋았으리라.
평소보다 전력질주를 하다 보니 집에 도착할 즈음 헛구역질이 나오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집 앞에서 몇 분 간 호흡을 가다듬은 후 열쇠로 문을 열었다. 집 안에 들어가자마자 밥상덮개 안에 정갈하게 담겨있는 반찬들이 보였다. 엄마의 학교는 잘 갔다 왔냐는 따뜻한 인사 대신 눈앞에 보이는 반찬들이 엄마의 인사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늘 있는 일이라는 듯, 민수는 가방을 아무렇게 던져둔 후 급식비가 없어 아무것도 먹지 못한 배고픈 배를 빠르게 채우기 시작했다. 안방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티비 속 진행자와 이따금씩 들리는 웃음소리는 민수에게 백색소음이 된 지 오래였다.
민수의 어머니는 햇수로 10년이 넘은 근처 공장의 노동자였다. 10년 간 같은 일만 반복하다 보니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였으며, 가끔 공장주가 일주일정도 월급을 미룬 후 주더라도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공장 일을 마치고 퇴근하더라도 그녀의 삶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기계처럼 작업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와 쫓기다시피 밥을 먹고, 그녀의 아들 밥을 차려주는 것이 그녀의 루틴이었다. 다만 안방으로 가 티비를 시청하는 것, 이 단 한 가지가 그녀의 삶의 낙이였다. 그러나 정말 티비 프로그램이 웃겨서 웃는 것인지, 억지로라도 웃기 위해서 티비를 시청하는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백색소음이 됐다고 해도 안방에서 들리는 소름 끼치는 그녀의 웃음소리는 밥 먹는 민수를 섬찟 놀라게 할 때가 있었다. 오히려 가끔은 그녀가 억지로 웃는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민수는 저 작은 티비 하나가 엄마에게 웃음이란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이 고마운 한편 부럽기까지 했다. 그는 아직 찾지 못한 취미를 그녀는 이미 찾은 것이니. 적어도 민수는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