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정답은 없다

'완성'을 넘어 '완전'으로 가는 방법

by 성장디렉터
16세기 이탈리아 철학자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인간이라는 것은 변덕스럽고, 가식적이고, 욕심 앞에 눈이 멀어 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 세상에는 과거, 현재, 미래 시대와 상관없이 항상 무수히 많은 리더가 존재해왔으며 존재할 것입니다. 리더십에 정답은 없습니다. 결과론적으로는 성공한 리더가 탁월한 리더십으로 칭송받게 되어온 것이 역사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무수히 많은 리더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운 리더가 있을 것이며, 함께 하고픈 리더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살아보니 정말 불편한 리더도 있더군요. 그게 세상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리더로 기억되고 싶은가요?




일본 :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 : 카리스마 리더십


중세 일본의 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천하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오다 노부나가는 독단적인 카리스마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리더의 독단적인 행동은 때로 위험할 수 있지만, 준비된 독단성은 엄청난 효율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노부나가는 권력가의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노부나가는 권력가인 쇼군을 받드는 제후의 가신에 불과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노부나가는 독단적인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신하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거의 거치지 않았으며, 회의도 하지 않았습니다. 통상적으로 회의의 목적은 다음 중 하나입니다. 1) 상호 간의 정보 전달 2) 문제 해결 3) 의사 결정 4) 조정과 타협 5) 상호 이해 6) 학습효과 7) 새로운 상황과 방침 전달 하지만 노부나가는 회의가 가진 이런 요소 대부분을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부나가의 머릿속에는 모든 정보와 해결방안이 준비되어있었기에 조정과 타협의 과정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노부나가는 출중한 인물이었습니다.


노부나가가 부하들에게 요구한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정보력이었습니다. 노부나가는 ‘오와리의 멍청이’로 불렸는데 거리에 나와 유랑자들과 대화하며, 돈을 주고 정보를 사는 등 당시의 전통적인 무사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시간을 거치면서 노부나가는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남들보다 트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노부나가가 총애했던 히데요시와 미쓰히데 역시 전통적인 무사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들이었습니다. 히데요시는 유랑 농민이었으며, 미쓰히데는 유랑 무사였습니다. 유랑생활을 통해 습득한 그들의 정보수집능력을 높이 산 노부나가는 둘을 측근으로 두었던 것입니다. 노부나가의 ‘천하통일’이라는 꿈에는 수많은 뛰어난 부하들이 함께 했습니다. 과연 노부나가의 어떤 면이 뛰어난 인재들을 노부나가 밑으로 모여들게 했을까요.


노부나가는 자신이 유능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유능함을 시샘하지 않고 사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분과 지위에 얽매이지 않는 인사를 단행할 수 있었습니다. 유랑 농민에 지나지 않던 히데요시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노부나가는 배신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하야시는 노부유키를 도와 노부나가를 등졌으나 패배했고, 노부나가의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노부나가는 당시에는 그를 용서해줄 수밖에 없어 용서했지만, 25년 뒤 결국 처벌했습니다.


노부나가는 자신 밑에 모인 수많은 인재를 적재적소에 사용하며, 천하통일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노부나가의 인재 등용 법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A)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는 부하

B) 말하면 즉시 이해하는 부하

C) 말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하

A그룹에 속한 부하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노부나가가 총애한 히데요시와 미쓰히데가 있습니다. 이들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노부나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정보력을 지닌 인물들이었습니다. B그룹의 인재들은 기존 기득권층과 A그룹에 속한 부하들의 융화제 역할로 사용했습니다. 마지막으로 C그룹에 속한 부하들에 대해서 노부나가는 매우 엄격한 대응으로 일관했습니다. 노부나가는 이들을 자기 변혁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부하로 보고 추방하거나 배제해 버렸습니다.


노부나가의 모든 면이 현대의 리더에게 적합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보를 중요시하고 유능함을 기본으로 한 준비된 독단적 결정은 효율성을 추구하는 현대의 리더들에게도 분명 필요한 덕목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 무사가 아닌 리더, 실용성의 끝판왕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천하를 통일 후 수많은 군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상대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임진왜란을 일으켰습니다. 평화시대에 군인들은 문제를 일으키고, 자신의 처우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기 마련입니다. 임진왜란에서 사망한 조선군은 전체 참전군인 97,600명의 72%인 7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전체 사망자도 약 300만 명으로 조선 전체 인구의 25%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수치입니다.


젊은 남자 상당수가 죽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학창 시절 국사책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리의 철천지원수였습니다. 그에게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그에 대해 한번 조심스레 얘기해볼까요?


히데요시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무장들은 저마다 멋진 표식을 가진 깃발들로 자신의 출신을 뽐내었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인 히데요시는 이러한 열등감을 오히려 분발을 위한 기폭제로 사용했습니다. 그는 무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칼이나 창, 철포를 들고 싸우는 게 서툴렀습니다. 하지만 주어진 상황을 이용하는 지혜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랜 세월 무사들의 몸에 밴 전투 습관이나 방법을 타파했습니다. 전투를 모르는 하급 무사에게는 긴 창을 사용하게 하고, 적지에서 쌀을 몽땅 사들여 상대의 군량미 조달을 막는 등 무력이 아닌 돈을 이용하는 전투를 펼쳤습니다. 절묘한 토목공사를 활용하여 적의 성을 공격하고 승리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이런 발상전환으로 그는 노부나가의 신뢰를 얻어, 결국은 가신의 우두머리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보며 자책합니다. 더불어 타인에게도 그 사람의 단점과 실수에 대해 반복적으로 “잔소리”만 합니다. 승리는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할 때 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히데요시는 이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노부나가의 가신 중 가장 무술을 못하는 사나이, 히데요시는 무사 사회를 아웃사이더의 위치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냉정하게 살펴 행동으로 옮긴 사람이 히데요시입니다.


히데요시는 젊은 시절부터 경제감각이 뛰어나서 물자 절감과 매매를 통한 이익을 남기는 부문에서 천재적 역량을 발휘했습니다. 땔감 비용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노부나가를 위해 그는 몇 가지 묘수를 발휘하였는데, 첫째는 아궁이 앞에 흙으로 울타리를 쳐 불이 새지 않도록 해서 엄청난 비용을 절약한 것입니다. 또한, 하루에 필요한 땔감 사용량을 체크하여 사용량을 1/3 수준으로 줄였다. 중간상인을 통하지 않고 직접 산에 있는 나무를 통째로 사들이고, 나무에 도장을 찍어 속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20일이 지나도 진척되지 않은 공사를 이틀 만에 마무리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인부들을 10조로 나누어 10칸씩 일을 맡겨 경쟁체제를 도입한 것입니다. 히데요시는 말재주가 좋은 데다 실행력이 있고, 배짱도 갖추었습니다. 바로 이때라고 여겨지는 순간에는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행동했습니다. 히데요시는 생애를 통틀어 182회에 달하는 전투를 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노부나가가 배신을 당해 전쟁에서 철수해야만 하는 긴박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이때 히데요시는 자청하여 쳐들어오는 대군을 막아서는 ‘신가리’를 자청하고 나섰는데, 그것은 아군을 구하기 위한 방파제로서 여차하면 전원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자살 특공대였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주군을 섬기는 부하를 어떤 사람이 아끼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것도 매번 최고의 능력을 발휘해 모든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성공으로 이끄는 인재라면 말입니다. 최고의 인재란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컫는 말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울지 않는 두견새는 죽여야 한다는 오다 노부나가,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게 해야 한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달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일본 전국시대 천하의 지배자라 불리던 3명을 단편적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도쿠가와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노부나가가 반죽하고, 히데요시가 만든 떡을 간단히 먹어버린 도쿠가와 당시 전국시대의 판세는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도쿠가와는 간단히 어부지리로 천하를 얻게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노부나가가 오래된 일본을 붕괴시켰고, 히데요시가 통일 일본을 만들었다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통일 일본을 정비한 인물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 그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지방의 작은 호족의 아들로 태어나 6세부터 19세까지 13년 동안 오다가와 이마가 와가의 인질이 되어 사람들의 차가운 눈칫밥을 먹었습니다. 오다가에서 이마가 와가로 건너가게 되자 이마가 와가의 식솔들은 도쿠가와를 더욱 우습게 대했습니다. 함께 간 가신들이 보복을 하자고 할 때도 도쿠가와는 참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인질이라는 신분에 철저해야 돼. 인질이라는 처지에 전념하면 적어도 내가 성실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어.” 그는 그렇게 전국시대의 여론을 기다렸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권력을 가진 자에게는 급여를 적게 주고, 급여가 많은 자에게는 권력을 주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에게 권력과 경제력을 동시에 주지 않음으로써 그는 서로를 견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또한 그는 철저히 원교근공(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는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과는 적절한 선을 유지하여 형평성과 보편성을 유지함) 정책으로 인재를 관리했습니다.


그는 권력자이자 리더로서 인재를 모았습니다. 히데요시가 진귀한 보물을 자랑할 때 오히려 이에야스 자신의 보물은 자신들의 부하 가신이라고 했던 사람입니다. 자신의 부하를 신뢰했으며 곁에 두면서도 꽃과 열매를 같이 주지는 않았습니다.


도쿠가와는 자신을 싸구려 취급하지 않은 남자였습니다. 도쿠가와 이전에 히데요시는 출신성분이 나빠 세력이 없었습니다. 권력을 잡은 뒤 그는 재력을 이용해 자신의 세력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과 성을 가신들에게 하사했습니다. 반대로 도쿠가와는 선택하고 억제했습니다. 도쿠가와라는 성은 친족과 특별한 관계 이외에는 절대로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쿠가와라는 성은 권위의 표상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에도로 입성할 때 다이묘로 등용한 인물들은 친족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충직한 가신들이었다.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불만이 쌓였지만 도쿠가와를 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택받은 자에 대한 적대감이었고, 선택받기 위한 오기였습니다. 이것은 결국 도쿠가와에 대한 충성심으로 표출되었으며, 그들은 오히려 누구보다 충직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성장기에는 철저히 인질로서 인내했으며, 후에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맹자이자 가신으로서 천하를 얻기까지 인내했습니다. 인정이 많은 쇼군, 부하들에게 믿음을 주는 쇼군이면서 파벌을 만들어 서로를 견제했습니다. 무조건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는 리더가 많은 오늘날, 다면성의 리더십도 새로운 각도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날 일본의 최고경영자들이 후계자로서 너구리 영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은 인물을 원하는 것에 힌트가 있습니다.




유럽 : 나폴레옹, 마가렛 대처, 윈스턴 처칠



나폴레옹 : 지도자란 희망을 파는 상인이다


수 없이 많은 세계의 위인들 중,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분명 없을 것입니다. 프랑스의 식민지 코르시카에서 태어나 황제의 자리까지 올랐던 시대적 인재, 어릴 적 위인전에서, 역사책에서 그리고 심지어 미술 교과서에서까지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바로 그 인물 ‘작은 거인’ 나폴레옹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나폴레옹은 1769년 8월 15일생으로 프랑스의 군인인 동시에 정치가이며, 프랑스 대혁명 시기 말기 무렵의 정치 지도자이자 1804년부터 1815년까지 프랑스의 황제였습니다.


그의 업적 중 최고로 꼽히는 나폴레옹 법전은 세계 민법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으며, 전장에서 승리를 지휘하는 장군으로서의 역할로도 그는 돋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럽 전체에 프랑스 대혁명의 이상을 퍼트렸으며, 이전 정권의 양상을 복원하는 제국 군주제를 통합했습니다. 나폴레옹은 50차례 이상의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하지만 스페인 침공과 러시아 원정에서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짧고도 긴 그의 통치는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유배지에서 삶을 마감한 이후 오늘날까지 전 세계에서 그를 다룬 출판물은 가짓수만 어림잡아 8만여 권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나폴레옹이란 위인이 이 시대에 차지하는 비중을 대략적으로나마 짐작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리더십의 핵심 키워드는 카리스마입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항상 자신의 신념에 대해 확신을 가졌으며, 부하들에게 자신이 가진 이상에 대해 전파했습니다. 이러한 리더십은 병사들을 하나로 단결시켰고, 연전연승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또한 나폴레옹은 병사의 수 보다 그들의 사기가 승리를 결정한다고 믿었기에, 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직접 목숨을 걸고 전장의 맨 앞에 나섰습니다. 이에 더해 병사들의 영혼을 울리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사람은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닫고, 병사들에게 자부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말들을 적시에 들려주었습니다. 이러한 말뿐만 아니라 그는 부하들 개개인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였고, 사령관이 병사들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다는 점을 각인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처럼 나폴레옹의 ‘용인술’은 부하 병사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하였고, 그는 그들의 절대적인인 지지와 신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남들과는 다른 비범함으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나폴레옹, 그에게서 우리는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 올바른 조직관리법과 ‘희망을 파는’ 동기부여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가렛 대처 : 철의 여인


우리에게는 ‘철의 여인’이라는 별칭이 더욱 친숙한 마가렛 대처는 12년 동안 (‘79년~’90년) 영국의 수상으로 재임하며 일명 ’ 대처리즘(Thatcherism)‘으로 영국의 경제를 끌어올린 사람입니다. 좋은 리더의 덕목 중 손꼽히는 것이 바로 추진력입니다. 리더가 우유부단하면 빛깔 좋은 청사진이 놓여 있어도 전진할 수 없습니다. 실패의 두려움이 발목을 잡아선 안 됩니다.


대처리즘은 당시 침체기에 빠진 영국 경제의 원인을 과도한 정부의 개입이라 판단하여 각종 국유화와 복지 정책을 포기하고 민간의 경제 활동을 중시하며 추진한 경제 정책을 말합니다. 당시 영국은 우리가 겪은 바와 같이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등 국가적 위기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절망의 겨울’, ‘영국병’이라 불릴 만큼의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대처 수상의 강한 추진력이 없었더라면 영국은 살아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가렛 대처는 이러한 추진력 덕분에 영국인들이 가장 미워하는 사람 1위로 선정된 적도 있었습니다. 노동조합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핵심이었던 노동개혁은 극심한 반발과 함께 결국 수많은 노동자에게 실직을 안겨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12년에 걸친 집권 기간을 통해 ‘영국병’을 치유하고 영국을 다시 경제대국으로 부활시켰습니다.


실질 GDP 성장률은 연평균 3% 이상을 기록했으며 연평균 10%를 넘었던 인플레이션도 6%로 낮추었습니다. 대처리즘을 탄생시킨 대처 수상는 엄청난 다독가였습니다. 대처가 자라난 그랜덤 시의 시장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식료품점의 종업원에서 시작한 자수성가형 인물입니다. 그녀는 교육에 대한 열등감과 갈망으로 도서관에서 서적을 빌려 지식 충족에 나서는데, 이때 아버지가 필요로 하는 책을 가져다주며 그 책들을 탐독한 것입니다.


대처가 살았던 그랜덤시가 풍기던 시대적 분위기도 큰 몫을 하였습니다. 당시 그랜덤시는 과거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정신인 근면, 검소가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곳으로 과거 영광의 상징이었던 대영제국의 사회 분위기가 남아 있는 도시였습니다. 대처는 어린 시절에 느꼈던 대영제국의 분위기를 떠올리며 강력한 영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녀의 정책은 훗날 ‘그랜덤 주의’라고까지 불리게 됩니다. “생각은 말이 되고 말은 행동이 되며, 행동은 습관이 되고 습관을 인격을 형상하며, 인격은 운명을 좌우한다.”라는 그녀의 명언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에 입각한 근면·검소·성실, 그리고 끊임없는지에 대한 갈구는 그녀의 생각이었고 행동이자 습관이었습니다. 이것들이 대처리즘을 탄생시켰으며 ‘철의 여인’이라는 운명을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2013년 4월 8일, 87세의 일기로 타계하면서 ‘돈 낭비’ 하지 말라며 국장(國葬)을 거부한 진정한 ‘철의 여인’이었습니다.



윈스턴 처칠 : 2차 세계대전의 세계적인 리더


윈스턴 처칠은 학창 시절 눈에 띄게 태도가 나쁜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생활기록부에는 ‘품행이 나쁜 믿을 수 없는 학생으로, 의욕과 야심이 없고 다른 학생들과 자주 다투며, 상습적으로 지각하고 물건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며 야무지지 못하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삼수 끝에 입학한 사관학교에서도 두드러진 점이 없던 그가 어떻게 세계적인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윈스턴 처칠은 남아프리카 보어전쟁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면서 일약 ‘전쟁 영웅’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 보수당 후보로 출마하여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그 이후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상승곡선으로 나아가던 윈스턴 처칠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해군 장관직에서 물러납니다.


그는 이 일에 대해 회고록에서 “우리는 큰일을 치르면서는 종종 커다란 실수들도 오히려 양해가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넘어가는데 반해, 국지적인 문제를 다룰 때는 조그만 실수까지도 크게 부풀려서 처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처칠은 모름지기 최상급의 정책 결정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은, 지휘계통의 정점에 서서 전체를 관망해야지 최전선의 구체적인 실전에 몸을 내맡겨서는 안 되는 법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후 그는 리더로서 세세한 작전 참여나 지시보다는 전체적인 안목과 방향성을 중심으로 리더십을 발휘하게 됩니다.


또한 윈스턴 처칠은 영국의 뛰어난 지도자임과 동시에 깊은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국민들이 혼란에 빠져있을 때에 강인한 의지와 결단력을 보이며 국민들에게 용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우연이나 환경에 의해 좌우되지 않도록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늘 다짐 하지만, 어쩌면 인간이 스스로의 운명을 의식적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믿는 바로 그 점에 인간성의 진정한 위대함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라고 말하며, 처칠은 운명을 의식적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영국이 숱한 전쟁으로 돈도 무기도 없었을 시절, 윈스턴 처칠은 BBC에서 방송에서의 호소로 인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를 설득해 무기대여 법을 통과시켰으며 이를 통해 영국은 전쟁을 끝장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였습니다. 처칠은 이성적 판단에 근거한 감성적인 호소, 처칠만의 돋보이는 리더십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철저히 계산된 감성적인 호소로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내었습니다.


“이 정부에 참여한 장관들에게 이야기했던 대로 의회에 말합니다. 내가 바칠 것은 피와 땀과 눈물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가장 호된 시련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신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모든 힘과 우리의 모든 능력을 다하여, 인류가 저지른 개탄스런 죄악의 목록 가운데에서도 가장 극악한 폭정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는 새로 구성된 내각에 대한 신임을 요청하기 위해 위와 같이 처절하게 감성적으로 연설했습니다. 그리고 이 연설 이후 영국 국민들에게 처칠은 용기와 희망을 주는 뛰어난 총리이자 리더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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