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 회송'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암 치료 그 후
벌써 5년이 흘렀다.
갑상선 유두암 확진을 받고 전절제 수술을 받은 지
만 5년이다. 이번에 방문한 대학병원 주치의 선생님이 뜻밖의 말씀을 하신다.
"환자분, 모든 수치 정상이고 이 정도면 완치로 보이니, 사시는 곳 근처 병원으로 회송 조치해 드릴게요."
이제는 진짜 큰 일 없으면 저랑은 더 이상 안 봐도 됩니다. "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결정된 거다.
정작 나는 시원섭섭하달까. 그동안 주치의 선생님과는 큰 언니처럼 오랜 은사님처럼 정이 많이 들고 의지가 많이 되었는데, 갑자기 일방적 이별 선언인 것이다.
전혀 사적이지 않은 대학병원 교수님과 일개 환자의 만남이었지만, 그 수많은 환자들 중 한 명일 뿐인 내가 느끼는 감정은 너무도 특별했다. 수술 직전 차가운 수술방에서 내 손을 꽉 잡아준 집도의이자 주치의 선생님, 그의 따뜻함을 생생히 기억하기 때문이리라.
내가 처음 병을 인지하게 된지는 사실 십 수년도 넘었다. 회사 정기 종합검진에서 목에 이상한 결절이 두 개 보인다는 초음파 결과를 받고는 애써 무시했었다.
대부분 정밀 검사해도 양성이고, 실제 동네 의원에서 '세침검사'라는 조직검사를 했을 때도 오십 대 오십 애매한 의견이었다.
그때의 나는 둘째 아이가 갓 태어난 시점이었고, 안팎으로 너무 복잡한 일들이 산적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부담을 떠안고 싶지 않았다. 그런 숙제들을 생각하면서 정작 중요한 내 몸은 건사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병을 키운 건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친한 직장 동료가 같은 병으로 수술을 예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서야 나도 '아차' 싶어 부랴 부랴 대학병원 정밀검사를 다시 실시했다.
슬픈 느낌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 법,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악성 판정을 받았고, 그 해 연말 생애 첫 전신마취 수술을 감행하였다.
혹자는 소위 '암' 판정을 받으면 그 간의 살아온 인생을 복기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짓는다고 하는데, 나는 그러지는 않았다.
이 또한 내가 해결해야 할 인생의 숙제라고 여겼을 뿐, 그때 역시 뒤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그때는 이미 나에게 나만을 쳐다보는 아이가 셋이나 있었고, 빈 말일 수도 있지만 나 없이는 못 산다는 남편이 있었다. 그게 어떤 막중한 책임감으로 다가와 서였는지, 암 선고 당시 슬프다기보다는 이것을 얼마나 빨리 해결하고 헤쳐 나아가야 하는지 초조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실 그런 조바심이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로 발동한 나의 간절함으로 수술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졌고, 회복도 빠른 편이었다. 덕분에 회사 복귀도 병가를 낸 지 한 달 만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할 수 있었고, 그 후로 벌써 5년이 흐른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 시간을 잠시 아팠던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것 같다. 무던한 성격 탓일 수도 있다.
다행히 회송 조치가 되어 이제는 집 근처 병원에 슬리퍼 신고 내원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
수술 전에는 수술 후 평생 복용해야 할 호르몬제, 비타민, 칼슘제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삶의 질이 나빠질 거라느니, 부정적인 생각도 많았다.
하지만 건강한 사람들도 요즘엔 면역력 유지 강화를 위해 이것저것 챙겨 먹는 시절 아닌가.
만사는 다 해석하고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물론 모든 불행의 경중은 다를 것이고, 저마다 개인차가 분명히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런 큰 병이 찾아왔을 때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회복불능의 고통 속에 빠져 살아갈 수도 있다.
나에게 머물다 간 '질병'이라는 불행은 그것으로 인해 건강에 대한 경각심과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의미 있는 것이었다. 이 역시도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더라면 절대 몰랐을 값진 경험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번 내 인생의 허들에 감사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