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생활을 하는 사람은 소속되어 있는 조직이 크던 작던 관운(官運)이란 게 있어야 그나마 제 때 승진도 하고 욕심만큼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그 운을 믿는다. 그것은 어떤 일시적 맹목이 아니라 20년 가까운 대기업 조직생활을 하면서 저절로 알게 된 나만의 인지라고 할까. 어떤 직관 같은 거다.
걔 중에는 그게 아니라고 아직도 개인의 노력과 능력이 전부라고 주장하는, 아니 그러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은, 그리고 사람들이 모인 조직은 8:2의 법칙, 나는 개인적으로 9:1의 법칙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그것은 소수의 2나 1의 인원이 전체 조직의 운명을 이끌고 간다는 경험적, 통계적 법칙이다. 어쨌든 여러 주장과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의 직감은, 관운은 때대로 절대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보통 조직 내에서 관운이 좋은 사람은 특출 나게 남보다는 빨리 혹은 노력에 비해 수월하게 일이 잘 풀리는 경우가 많다. 옛말에도 천재 또는 미인들이 단명한다고 하듯, 나 또한 그런 사람들이 그 끝이 그리 아름답지 못한 경우를 종종 보아왔다.
내가 사회생활 초년 시절에 업무상 모셨던 사장님은 누가 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스마트하고 경영능력도 좋으시고, 게다가 그룹 오너가 키우시던 분이라 초고속으로 사장 자리까지 오르셨던 분이었다. 물론 국내 최고 학부 및 미국 박사 학위는 기본이었다. 또한 그 스펙이 무색하리만큼 일도 수완도 경영능력도 훌륭했다. 그래서 늘 나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의 워너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게 영원할 것처럼 보였는데, 어느 해인가 그룹 내 세대교체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실책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선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관예우로 몇 년 회사의 자문 역할을 하시는 걸 보았는데, 그것도 잠시, 퇴임하신 지 2년 째던가 뜻밖의 부고 소식을 들었더랬다. 그분께 뜻밖의 불치병이 발병되어 2년 정도 투병생활을 하시다가 유명을 달리하신 것이었다. 나는 당시 동료, 선배들과 조문을 하면서 권력의 허망함,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무상함, 여러 가지 그 분과의 추억이 떠올라지며 한동안 멍 하게 지냈던 적이 있다.
그렇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3년 전에도 모 임원 한분이 퇴임 후 3년 만에 고약한 암으로 유명을 달리하시는 걸 보았다.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큰 에너지를 조직에 쏟아부었던, 어떤 커다란 상실감이었을까. 누구도 모르는 우울감이었을까. 그분들의 고통을 가늠할 수 조차 없었던 것 같다.
지금에 이르러 이 만큼 조직생활을 해보고 나 또한 중견 관리자가 되어보고 나니, 나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또는 백 미터 달리기를 숨 고를 새도 없이 달려가는 많은 사람들을 또 보게 된다. 그 대열에 합류를 할 수도 늦을 수도 아니면 개인기로 더 빨리 갈 수도... 하지만 한편으로 드는 생각이 있다. 어쩌면 인간의 생명은, 또는 운명은 정말 너무 쉽게 무너져 버릴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얼마 전 모 TV 프로그램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근무하는 연구원들이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분들 이야기를 빌면 수많은 부검을 하다 보면 정말 사연도 다양하고, 죽음은 너무 쉽게, 허무하게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담담히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루하루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소중하게, 처절하게 알차게 보내야 한다고... 그런 울림을 전해 받을 때 과연 나는, 우리는 무엇을 위해 지금을 살고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근본적인 삶에 대한 질문이다. 자칫 그게 심각해지면 모든 게 허무해지고,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 그러자면 이내 우울증에 이를 수도 있겠다는 자각을 하면서도 끝내 지금도 고민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그만큼 유한하고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도 반성한다. 분명한 것은 각자 소중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꼭 우선적으로 지켜야 하고, 그것이 존재하고서야 비로소 개인의 야망이나 사회적 성공을 이루었을 때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은 것에도 주어진 것에, 모든 기회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감사할 일이 점점 많아지는 인생이 펼쳐진다.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만이 소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성공, 사회적, 개인적 욕망과 관운이 합작되어 이루어낸 그것을 이룰 자격과 그것을 이루었을 때 지속 가능한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잠시 잠깐 거대한 산을 정복했다고 도취하는 것은 사실 얼마 못 간다. 그 이후 아름답게 내려올 줄 아는 용기, 아름답게 잊히는 추억, 끝을 알고 준비하며 달려가는 여유, 그래서 몇 수 앞을 볼 줄 아는 인사이트. 특히 잘 나갈 때, 앞으로 펼쳐질 인생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준비하는 유비무환의 자세가 가장 중요하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