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문도 아닌

by 김벌새

쫓기는 꿈을 꿨다. 근데 내가 아니고 조승우가... 꿈속에서 조승우가 나오는 극에 지나치게 몰입을 했더니 눈을 뜨고 한동안 명치가 아팠다. 이 와중에도 나는 꿈을 꾸면서도 '이 작가는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하려고 이렇게 사건을 벌려놨을까' 걱정했다.


“쫓기는 꿈은 뇌가 도망가야 해! 라고 착각하면서, 자고 일어나도 몸이 진짜로 도망친 사람처럼 뻐근하고, 숨도 짧고 얕게 쉬게 돼. 진짜로 도망치듯 잔 거야… “ 지피티의 과정 섞인 위로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고, 새로 쓰는 시나리오가 스트레스긴 스트레스인가 보구나 하며 늦은 아침을 시작한다.


'하루의 시작은 꼭 시나리오와 관계없는 책을 읽어야지, 나에게 숨 쉴 구멍을 줘야지'라고 늘 다짐하면서도, 오늘 아침 다시 조급한 마음이 들어 '아니다 오늘만 시나리오랑 연관 있는 책으로 하루를 시작하자'라고 타협했다. 그러나 다시, 책상에 앉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고선경의 시집을 꺼냈다. 이름마저 아주 귀여운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봄비

하품

봄잠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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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은 춥고 근데 좀 귀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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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미롭겠지 감미로운 기분은 내가 나의 비밀을 떠올릴 때나 느끼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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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이 폭신폭신 녹아내리고 있었다


인생이 이 시집과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주 어렸을 적부터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않았던 마음 깊은 곳에 '결여된 느낌에 대한 공포감' 혹은 아주 작은 '존재론적 수치심'이 박혀있었던 것 같다. 아침 일찍 운동 가고 없는 아빠의 이부자리, 거실에서 흘러나온 TV 소리(오빠가 디지몬을 보고 있다), 자도 자도 잠이 부족한 엄마는 한결같이 대각선으로 자고 있는 그런 나른한 주말 아침. 분명 포근하고 편안하기만 한 그런 아침인데도 전혀 낯선 감각을 느끼며 잠에서 깨곤 했다. 눈을 뜨면 '어? 여긴 어디지? 집인가? 아 집이네.. 근데 집인데 왜 이렇게 낯설지?' 하는 뭐 그런 감각.


나의 비밀을 떠올리면 나는 '부끄러움과 숨기고 싶음'을 먼저 떠올리는데 고선경 시인은 감미로움을 느낀다. 왠지 시인은 이 낯선 감각을 한 번 도 안 느껴봤을 것만 같다. 아주 오랜만에 자취방에서도 이 낯선 감각을 느꼈다. 이건 사실 어렸을 때 느꼈던 그 감각과 똑 닮은 것은 아니고 짙은 외로움과 비슷하다. 리틀 포레스트 속 김태리의 대사 "나 배고파서 내려왔어, 진짜 배고파서"가 문득 생각나는 오후였다.


주말에 지수 언니와 슬기를 만난 이후로 마음속에서 이 외로움의 색이 더 짙어진 느낌.... 우리는 5살 때부터 같은 유치원에 다니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매일같이 보았다. 엄마들 모임이 20년 넘게 유지된 탓인지 조금은 서먹서먹해질 중학교 고등학교 때에도 1년에 한 번씩은 봤다. 이 만남은 중학교 단짝 친구, 고등학교 단짝 친구를 만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는데 뭐랄까 가족보다는 먼 그렇다고 친구보다는 가까운 그런 사이랄까? 피 안 섞인 사촌 느낌이라고나 할까나?


피가 섞이지 않음에도 가족처럼 느껴지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참 애틋하다. 어렸을 때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르며 눈앞에 있는 슬기와 지수 언니의 존재 자체에 집중하게 되고, 비교하는 마음 없이 오랜만의 만남 속에서 즐거움만을 느끼며 눈앞에 있는 이 사람들의 평안함만을 바라게 된다. 이렇게 존재 대 존재로서 온기를 나누고 즐거움과 편안함만을 느낀 만남이 언제였지? ...... 근래엔 없었던 것 같다. 소비를 통해서 개인이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건설하는 '소비자 사회'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나는 '보이는 것을 통해 타인을 평가하는 것'이 익숙하다 못해 숨 쉬듯 자연스러워졌구나, 하며 반성하게 된다.


배두나가 꿈꾸는 좋은 세상은 인간이 서로 좋아하면서 사는 세상, 인간끼리 서로 연민을 느끼고 도우면서 사는 세상, 돈보다 인간이 더 중요시되는 세상, 어른이 아이에게 더 잘해줄 수 있는 세상이라던데. 이 오랜 인연에서 느꼈던 '존재 대 존재의 만남'을 다른 인연에도 확장한다면 이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일말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어쩌면 이런 존재론적인 교감의 부족이 나의 뿌리 깊은 외로움의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기억하겠니?

바다는 아무리 헹궈도 바다라는 것

내가 너를 계속 사랑할 거라는 것

-그때 내가 아름답다고 말하지 못한 것


하느님! 제발 이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아멘.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을 읽다가 글을 써서 그런지 시도 아닌, 산문도 아닌 것 같은 ... 크흠흠... 아 큰일 났다 시나리오 써야 하는데! 이렇게 오늘도 다른 곳에 더 열을 냈군! 다시 조급함을 느끼며 이제 진짜 이 시도 산문도 아닌 글을 마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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