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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Nov 09. 2020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시 읽기]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장과비평사, 1978)     




[단상]

흐르는 물에 삽을 씻는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의 비애도 함께 씻어 버린다. 삽을 씻는 행위는 그날 노동의 마무리이자, 내일의 노동을 위한 준비 과정일 것이다. 저무는 오늘에 벌써 다가올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강물 흐르듯 쉼 없이 흘러가는 세월 앞에서 삶은 고단하다.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샛강바닥 썩은 물’ 같은 밑바닥 인생이지만, 그래도 그곳에도 휘영청 달이 뜬다. ‘우리가 저와 같아서’ 슬픔을 버린 마음의 자리에도 옅은 희망이 돋는다. 달빛이 마을로 돌아가는 어두운 길을 위안처럼 비춘다.



*사진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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