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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Nov 28. 2020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시 읽기] 장석남 '배를 매며'



배를 매며


                             장석남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깜짝 놀라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와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이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비, 2001)     




[단상]

배가 들어오는 그 시각, 그 부둣가 장소에 앉았던 건 전부 우연이었다. 사랑은 조용히 와 닿는 배처럼 아무 기척도 없이 다가왔고, 넋 놓고 있던 나는 어찌할 수도 없이 그 속으로 끌려들어 갔다. 던져진 밧줄을 받듯 나를 향해 날아온 사랑을 나는 받아버렸다. 그리고 부둣가에 매어진 배처럼 사랑에 묶인 나. 사랑이라는 속박.

      

그런데 사랑은 속박은 속박이되 찬란한 속박이다. 사랑이 저 혼자 온 것이 아니라 구름과 빛과 시간이라는 찬란한 풍경과 함께 왔기 때문이다. 나는 물결처럼 울렁이는 마음으로 온종일 중력을 잊은 듯 둥둥 떠다닌다. 사랑의 부력, 환희! 사랑이란 온통 처음 아는 것 투성이다.



*사진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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