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 장석남 '배를 매며'
장석남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깜짝 놀라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와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이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비, 2001)
[단상]
배가 들어오는 그 시각, 그 부둣가 장소에 앉았던 건 전부 우연이었다. 사랑은 조용히 와 닿는 배처럼 아무 기척도 없이 다가왔고, 넋 놓고 있던 나는 어찌할 수도 없이 그 속으로 끌려들어 갔다. 던져진 밧줄을 받듯 나를 향해 날아온 사랑을 나는 받아버렸다. 그리고 부둣가에 매어진 배처럼 사랑에 묶인 나. 사랑이라는 속박.
그런데 사랑은 속박은 속박이되 찬란한 속박이다. 사랑이 저 혼자 온 것이 아니라 구름과 빛과 시간이라는 찬란한 풍경과 함께 왔기 때문이다. 나는 물결처럼 울렁이는 마음으로 온종일 중력을 잊은 듯 둥둥 떠다닌다. 사랑의 부력, 환희! 사랑이란 온통 처음 아는 것 투성이다.
*사진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