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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Dec 30. 2020

사랑은 형태 없이 그저 존재하는 것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7)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2017)는 초록빛 물속에 홀로 잠들어 있는 주인공 엘라이자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또한 초록빛 물속에 떠 있는 그녀다. 다만 이번엔 그녀가 죽음에서 기적처럼 깨어나는 순간이고, 혼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와 함께다. 그 사이 그녀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 처음과 마지막 장면 위로 나지막한 내레이션이 흐른다. 마치 곁에서 누군가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오는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를 읽어준 것만 같다.


그녀에 대한 얘기를 해줄까? 
목소리를 잃은 공주.
아니면 이 사건들의 진실을 말해줄까?
사랑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와
모든 걸 파괴하려 했던 괴물에 대해.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 장면




시대에 맞게 다시 쓴 동화     


“목소리를 잃은 공주의 “사랑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라는 내레이션은 우리에게 친숙한 동화를 떠올리게 한다. 바로 <인어공주>다. 사랑하는 왕자를 만나기 위해 다리를 얻는 대신 목소리를 내놓아야 했던 인어공주. 그래서일까, 영화 속 주인공 엘라이자는 들을 수는 있지만 말은 하지 못하는 언어장애가 있고, 강가에서 발견되어 고아로 길러졌으며, 유독 구두에 애착이 강하다. 


<인어공주>는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한 인어공주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슬픈 결말의 이야기다. 반면에 영화는 인어와 비슷한 신비의 수중 생명체와 엘라이자의 사랑이 위태롭게 이어지다 마침내 해피 엔딩을 암시하며 끝이 난다. 잔혹한 현실보다 아름다운 판타지를 진짜 결말로 믿는다면, 엘라이자의 목에 있는 흉터가 아가미로 바뀌는 장면은 그녀의 태생이 인어공주와 유사한 수중 생명체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가능하게 한다.     

     

구두를 닦는 게 매일의 일상인 엘라이자, 그녀는 사랑에 빠진 후 동경하던 빨간색 구두를 신고 출근한다


그런가 하면, 흉측한 외모의 괴생명체와 엘라이자의 사랑은 <미녀와 야수>를 연상시킨다. 영화는 ‘미녀’와 ‘야수’의 사랑과 시련과 성취, 그리고 이들을 방해하는 ‘악당’과 둘의 사랑을 응원하고 돕는 ‘조력자들’이라는 <미녀와 야수>의 모티브를 변주했다. 성에 갇힌 야수처럼 영화 속 괴생명체는 항공우주센터 실험실에 갇힌 외로운 존재다. 둘 다 죽음의 운명 앞에서 여주인공의 사랑으로 구원/구출된다. 또한 영화 속 악역인 스트릭랜드는 <미녀와 야수>의 악당 개스톤과 상당히 비슷하다. 자기애가 넘치고 차별적인 언행을 일삼으며 폭력적이다. 이들은 힘의 논리로 “모든 걸 파괴하려 했던 괴물”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스트릭랜드(좌), <미녀와 야수>(영화)의 개스톤(우)


<인어공주>와 <미녀와 야수>를 재해석한 듯한 이 영화는, 그러나 동화 속 여주인공의 전형성을 깬다. 엘라이자는 <미녀와 야수>의 벨처럼 외모가 뛰어난 ‘미녀’가 아니고 장애를 지닌 청소부라는 사회의 주변인 신분이다. 사랑을 얻고 나서 ‘공주’로 신분 상승이 되지도 않는다. 또한 엘라이자는 인어공주처럼 운명에 순응하고 사랑받기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고,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모험을 감행하는 주체적인 여성이다. 


그녀는 이웃이자 성 소수자인 자일스, 동료인 흑인 여성 젤다, 러시아 스파이 드미트리 박사와 협력해 권력자 스트릭랜드로부터 괴생명체를 탈출시키는 데 성공한다. 영화는 차별과 폭력에 대한 투쟁으로 연민과 공감으로 뭉친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를 제시하며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동화를 완성한다.     


사회적 약자들(장애인, 성 소수자, 흑인 여성, 외국인)의 연대




장애도 편견도 형태도 없는 사랑     


“그는 내가 뭐가 부족한지 몰라요. 내가 얼마나 불완전한지 몰라요. 그는 날 볼 때 있는 그대로의 날 봐요.” 엘라이자가 자일스에게 도움을 청할 때 간절한 눈빛과 격정적인 수화로 전한 말이다. 엘라이자와 괴생명체의 사랑엔 장애도 편견도 없다. 둘은 손짓으로 소통하고 음악으로 교감한다.  

    

엘라이자의 환상 속에서 그녀는 그에게 노래로 사랑을 고백하고 둘은 손을 맞잡고 춤을 춘다. <미녀와 야수>의 명장면인 무도회장 씬과 신기하게도 빼닮은 이 장면은, 음악의 선율에 맞춰 두 존재가 종(種)을 뛰어넘어 사랑으로 합일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음악은 특정한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주위를 감싸며 존재한다. 물도 형태 없이 주위를 서서히 적시다가 어느새 대상을 그 속에 푹 잠기게 만든다. 사랑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셰이프 오브 워터> 뮤지컬 장면(좌), <미녀와 야수>(영화) 무도회장 장면(우)

    

그대의 모양 무언지 알 수 없네
내 곁엔 온통 그대뿐.
(Unable to perceive
the shape of you,
I find you all around me.)


영화는 수백 년 전에 사랑에 빠진 누군가가 읊조렸다는 이 시로 끝을 맺는다. 어쩌면 사랑을 노래하는 시도, 사랑을 이야기하는 동화와 영화도, 형태는 제각기 달라도 이토록 닮은 것은 사랑의 본질이 결국 하나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셰이프 오브 워터> 포스터




*사진 출처: 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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