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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Jan 12. 2021

순하게 살기를 강요받은
여성들의 서사

황정은의 연작소설 <<연년세세>>를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을 읽은 다른 독자들의 감상은 어떨까? 나와는 다른 세대, 다른 성별, 다른 배경과 입장의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읽었을지 너무도 궁금하다. 그만큼 나에겐 소설의 여운이 강하다는 뜻일 것이다.



   

황정은 연작 소설 <<연년세세>>(창비, 2020)에 실린 소설 네 편엔 저마다 한 인물의 인생 이야기가 담겨 있다. <파묘>는 한세진, <하고 싶은 말>은 언니 한영진, <무명>은 엄마 이순일, <다가오는 것들>은 다시 한세진의 조금 더 확장된 이야기다. 합치면 한 가족의 서사가 꾸려진다. 이 가족 서사에서 남성들(아버지 한중언, 한영진의 남편 김원상, 막내아들 한만수)은 하나같이 조연일 뿐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어떻게 보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의 여성 수난사’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일까? 이들의 이야기는 어쩐지 낯설지 않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소설을 읽어 내려가다가도 문장 하나, 대사 하나가 덜컥 나의 뒷덜미를 잡았다. 자꾸만 내 삶의 어떤 장면들이 강제로 소환됐다. 똑같은 상황의 똑같은 말은 분명 아니지만, 나나 내 주변의 여성들이 비슷하게 겪었던 일들과 들었던 말들. 애써 잊으려 했고 그래서 잊었던, 불쾌하고 불편한 순간들이 속수무책으로 떠올랐다. 순간 말문을 잃어 얼굴을 붉힌 채 넘겼으나 뒤늦게 불쾌감과 모멸감을 안겨준 일들, 비위를 맞추거나 눈치를 보느라 하고 싶은 말을 삼켜야 했던 순간들…. 아무렇지 않은 듯 간신히 덮어두었던 기억이 이 소설로 인해 들춰져 미세 현미경으로 하나하나 들여다본 듯한 꺼림칙함이 있었다. 그래서 읽어내기가 유독 힘겨웠던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서 이순일, 한영진, 한세진 모녀에게는 밖으로 말하지 않고 자신의 가장 깊은 안쪽에 감춰둔 말들이 있다. 이들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하고 싶은 말>에서 한영진은 이렇게 말한다.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p.70)     


하지만 이 ‘생각’과 ‘안간힘’이라는 것이 대체로 여성들에게만 강요되어온 것 같은 느낌은 왜일까? 위 문장의 앞뒤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 사람(김원상)은 그냥, 생각을 덜 하는 것뿐이라고 한영진은 믿었다.
(...)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p.70)     


소설 속 남성들은 하고 싶은 말을 내뱉을 무슨 권리라도 가진 양 행동한다. <파묘>에서 이순일의 남편 한중언은 이순일의 외할아버지 산소에서 ‘처가 쪽 산소엔 벌초도 하지 않는 법(p.27)’이라며 절을 올리지 않는다. 아들 한만수는 뉴질랜드에서 친해진 노인의 선물을 엄마에게 전달하며 ‘어머니는 위대하다, 당신은 위대하다(p.34)’고 마치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사하는 듯한 말투로 얘기한다. 한영진의 남편 김원상은 외국인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는 아내에게 ‘Where is the toilet? 이 말을 니가 잘못 들은 거 아니고?’라는 문자를 보낸다. 모욕감과 닮은 말들.     


한영진은 엄마 이순일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 ‘그런데 엄마, 한만수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아. (p.81)’, 아들에게는 살고 싶은 대로 살라고 하면서 왜 자신에게는 ‘너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어(p.108)’라며 당신의 밥상 앞에 붙들어두었는지. 그러나 한영진에게도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p.81)’는 말은 은연중에 삶의 지침이 되어버렸다.     

 

현명하고 덜 서글픈 쪽을 향한 진리.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      




<무명>에서 이순일은 어렸을 때부터 꽤 긴 시절 동안 ‘순자’라고 불렸다. 순할 순(順)에 아이 자(子). 작가는 ‘순자가 왜 이렇게 많을까?’라는 질문에서 이 책이 시작됐다고 말한다. 자신의 이름을 잃고 무명이나 다름없이 살아야 했던 세대. 그래서인지 작가는 소설 속에서 인물의 이름을 끈질기게 호명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여성들은, 비록 순자라는 이름으로 불리진 않았어도, ‘순하게’, ‘모나지 않게’ 살라는 말을 숱하게 듣고 자랐다. 이 소설엔 세대를 거쳐도 여성들의 삶에서 발견되는 침묵의 강요와 어떤 설움 같은 것이 곳곳에 서려 있다. 책을 덮으며 알 수 없는 갑갑함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걸 느꼈다. 


황정은 연작소설 <<연년세세>> (창비, 2020)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가족 이야기로 읽을까? 그게 궁금한 적이 있었고 실은 지금도 궁금하다.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로 읽히건,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이야기이기를 바란다."

_<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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