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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Feb 16. 2021

시대를 살해하고 싶었던
어느 소년의 이야기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만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에드워드 양 감독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은 장장 4시간짜리 영화라는 것과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호평을 받은 대만 영화라는 것 외에는 어떠한 사전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보았다. 영화의 제목 때문에 보는 내내 언제 살인사건이 나는 걸까?’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는데, 예상 밖으로 영화는 상당히 호흡이 느렸고 다소 음울하고 정적인 분위기로 전개됐다. 1960년대 대만의 혼란스러운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한 소년의 성장기 또는 풋풋한 연애담을 담은 걸까 싶어 마음을 놓았는데, 영화 말미에 때와 장소도, 대상과 방식도 상상하지 못했던 살인이 벌어져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1961년 대만 사회를 경악하게 했던 ‘14세 소년의 또래 소녀 살인사건이라는 실화를 소재로 했다는 것을 알고 2차 충격을 받았다.     


1950년대 말 대만의 거리를 재현한 롱테이크 장면 (영화는 뛰어난 미장센으로 지금까지도 높이 평가받는다)




영화는 1959년 타이베이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때는 중화민국 건립 이후 10년이 된 시점으로 대만 사회는 원주민과 중국 본토 이주민의 갈등, 군사 정권의 사상 검열과 사회에 팽배한 관료주의, 일제의 잔재와 미국 문화의 유입 등으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양상을 띠었다. 변화와 혼돈의 소용돌이에 가장 쉽게 휩쓸린 건 아무래도 청소년들이었다. 영화는 초반에 자막으로 ‘부모 세대는 자식의 안녕을 바랐지만, 그 시절 학생들은 불안한 미래로 인해 학생 갱단을 조직해 자신의 정체성을 과시하며 생존 의지를 키워나갔다.’며 불길한 시대상과 앞으로 전개될 사건을 암시한다.      


샤오쓰와 '소공원파' 친구들


주인공 샤오쓰는 모범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불량스럽지도 않은 평범한 중학생이다국어 과목 성적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야간부로 옮기게 된 샤오쓰는 그곳에서 ‘소공원파’ 학생들과 어울리게 된다. 이 시기 학교는 무질서한 바깥 사회를 반영하듯 ‘소공원파’와 ‘217파’ 사이 갈등과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샤오쓰의 학교생활은 얼핏 일반적인 또래 아이들과 비슷한 듯하지만 어딘가 아슬아슬하게 지속된다. 그래도 샤오쓰는 지식인인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폭력에 가담하지 않고 거리를 두려 나름 노력하지만, 이미 학교는 그를 불량 학생으로 낙인찍고 그를 점점 궁지로 몰아간다. 하지만 세상에는 재수없는 사람과 불공평한 일이 너무 많아.” 아직 어린 샤오쓰에게도 세상은 불합리해 보인다.     


영화 중반쯤 샤오쓰의 아버지는 사상 검열이라는 이름으로 감금되었다 풀려난다 (실제 부자 사이인 배우들)


그런 그를 결국 파멸로 이끈 건 한 소녀다그녀의 이름은 밍이고, 폭력 사태 이후 도주 중인 ‘소공원파’ 보스 허니의 전 여자친구다. 미모가 뛰어난 밍의 주위엔 남자가 많다. 가난으로 엄마와 둘이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밍은 그들의 관심을 적당히 이용하는 법을 터득했다. 샤오쓰는 우연히 양호실에서 밍을 만나고 그녀에 대한 우정과 사랑을 키워간다. 


샤오쓰와 밍이 처음 만나는 장면


특히 ‘217파’에 의해 허니가 허망하게 죽음을 맞은 후 샤오쓰는 밍에겐 자신만이 남았다고 확신한다. 밍 모녀가 자신의 친구이자 부유한 집안 아들인 샤오마의 집에 가정부로 들어가 살게 되면서 샤오마와 밍이 사귀고 있다는 소문을 그는 믿을 수가 없다. 난 널 잘 알아. (...)네게 남은 희망은 나밖에 없어.” 그러나 이것은 샤오쓰의 순진한 착각이었다. 생존 자체가 절박하고 남자들의 관심에 지친 밍은 샤오쓰의 진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너도 다른 애들처럼 나한테 감정을 바라고 잘해 준 거였어. (...)네가 날 바꾸겠다고난 이 세상과 같아세상은 변할 수 없어.”      


샤오마의 집에 놀러간 샤오쓰와 밍, 그리고 친구들


사실 샤오쓰는 자신이 아는 밍의 모습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혼란스러웠다. 밍을 카메라 테스트했던 감독처럼 그녀의 연기에 자신도 속은 것은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자연스러워진짜와 가짜 구분도 할 줄 모르면서뭐 영화를 찍는다고당신이 뭘 찍고 있는지 알기나 해?” 샤오쓰가 감독에게 했던 외침은 어쩌면 자기 자신을 향한 자조적인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밍의 카메라 테스트 장면, 영화는 끝까지 밍의 속마음을 수수께끼로 남겨둔다


샤오쓰는 “난 이 세상과 같아. 세상은 변할 수 없어.”라는 밍의 말을 듣고 그녀를 칼로 찌른다. 그의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있던 세상에 대한 분노가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대상에게 표출된 것이다살해 직후 죽은 밍을 일으켜 세우려 하고 오열하는 샤오쓰를 보면 그가 진짜로 살해하고 싶었던 대상이 그녀였을까 의구심이 든다. 샤오쓰는 폭력과 거짓에 잠식된 그 시대를 살해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격동의 시대라는 광풍 앞에서 촛불처럼 흔들리다 결국 꺼져버린 어린 영혼들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포스터




*사진 출처: 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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