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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Feb 18. 2021

시를 쓰지도,
쓰지 않을 수도 없었던 시인

김연수의 <일곱 해의 마지막>을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쓰지 못하는 것이오, 쓰지 않는 것이오? (p.57)     


1958년의 어느 날, 중앙당 문화예술부 문학과 지도위원 엄종석이 기행에게 묻는다. 시작(詩作)에 매진하지 않는다는 추궁이다. 기행은 시인 백석의 본명. 백석은 이미 지난 십수 년간 동시 외엔 시를 쓰지 못했다. 그조차도 조선작가동맹 작품 총화 회의에서 신랄한 비판을 받고 위축된 상황이었다. 백석의 동시 「기린」은 시적 대상인 기린이 서구 동물이고 북한 아동의 현실과 유리되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시인은 ‘기린에게는 붉은 깃발을 다는 게 아니었다고’(p.21) 괴로워한다. 당의 문예 정책은 단순명료하다. ‘당은 생각하고 문학은 받아쓴다는 것’(p.53). 생각하지 않고 시를 쓰는 것, 그것이 시인 백석에겐 그렇게 어려웠다.   




시를 쓸 수도, 그렇다고 쓰지 않을 수도 없었을 백석의 삶을 김연수는 <일곱 해의 마지막>(문학동네, 2020)에서 소설로 재구성했다. 1957년부터 1962년까지 북한에서의 백석의 행적을 되짚어가며 작가는 상상력을 동원해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풀어냈다. 김연수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을 ‘백석이 살아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자,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마음속에서 놓지 않았던 소망에 대한 이야기(p.246)’라고 적었다. 허구라고 하기엔 이데올로기가 대립한 매섭기 그지없는 시대의 묘사가 너무나 생생하고, 가혹한 역사 속에서 소리도 없이 사라져버린 인물들의 사연이 세밀하다.     


‘시대의 눈보라 앞에 시는 그저 나약한 촛불에 지나지 않는다. (...)시의 할 일은 눈보라 속에서도 그 불꽃을 피워 올리는 데까지다. 잠시나마 타오르는 불꽃을 통해 시의 언어는 먼 미래의 독자에게 옮겨붙는다.’ (<일곱 해의 마지막>, p.81)     


백석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다. 그러니 그에게 월북 시인이라는 타이틀은 불합리하다. 그는 해방 후 그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초창기 조선일보에서 근무했던 영어와 일어, 러시아어에 모두 능통했던 ‘모던보이’ 백석. 일제 강점기 다수의 문인이 친일 활동을 할 때 침묵으로 일관하며 민족정신을 지킨 문인 백석. 그리고 북한 체제하에서 어쩔 수 없이 찬양시를 쓰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시를 남기지 않은 시인 백석. 그의 시와 삶이 녹아있는 이 소설은 안도현 시인이 쓴 <백석 평전>(다산책방, 2014)과 함께 읽으면 더욱더 입체적이고 풍부해진다.      


“백석 시인 이야기 좀 해주세요.”
(...)
“백석 시인은 말년에 전원생활을 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역시 똑같은 대답이었다. 북한에서 활동하는 시인이나 작가 그 누구를 붙들고 물어봐도 이와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났고 해방 후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북한에서 살았던 백석은 북한에서 아직까지 완전한 복권이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백석 평전>, p.421-422)   

  

마흔여덟, 시인으로서 한창의 나이에 ‘삼수갑산’의 ‘삼수’ 지방으로 파견 근무를 가게 된 백석은 결국 평양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사실상 추방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북한 문단에서 자취를 감춘다. 남북 분단의 현실에서 백석의 이후 삶은 온전히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소설은 삼수군의 어느 산골 협동 농장에서 양을 돌보는 양치기가 된 시인의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 눈보라가 날리는 어느 추운 겨울밤, 천불이 숲 전체를 활활 태우는 것을 지켜보며 ‘불탄 자리에서 새로운 살길이 열리는 것’( p.238)이라는 희망을 품는 백석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백석의 시(詩)라는 불꽃은 비록 눈보라 앞에서 나약했는지 몰라도 먼 미래의 시인과 독자에게 옮겨붙어 천불이 되었다. 산골에서의 그의 여생이 그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처럼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었기를, 그가 시로부터 격리된 삶이 아니라 시 자체로 살아갔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시인의 사후 약 25년이 지난 이 추운 겨울, 두 권의 책을 연달아 읽으며 추위보다 냉혹한 시대를 시라는 촛불 하나 가슴에 켠 채 고고하게 살아냈을 백석을 떠올려보았다. 


김연수 장편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 (문학동네, 2020) & 안도현 <백석 평전> (다산책방, 2014)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1912-1996)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의 시,「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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