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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Mar 11. 2021

올리브,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 <다시, 올리브>를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으며 주위를 지배한다. 나는 현실에서 그런 인물에게 종종 압도당한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독단적이며 성격이 뾰족하고 거침없는 언행을 일삼는 사람은 일단 피하고 보는 편이다. 내가 상대에게 휘둘리거나 상처를 입는 상황이 두렵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나면 그를 ‘나와는 맞지 않는 사람’으로 빠르게 분류하고 되도록 거리를 두었다. 살면서 터득한 지혜랄까.




그래서인지 나는 이 책 <올리브 키터리지>(문학동네, 2010)를 읽는 내내 소설 속 주인공 올리브에게 영 호감이 가지 않아 곤혹스러웠다. 그녀의 괴팍한 성정과 별난 행동, 까칠한 말투를 참고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올리브 키터리지는 메인 주 크로스비에서 중학교 수학 교사로 근무하다 은퇴한 중년의 여성이다. 학생들 사이에서 그녀는 무섭기로 소문난 선생님이었고 동네 사람들은 까다롭고 퉁명스러운 그녀와 어울리기를 피한다. 그녀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미국판 욕쟁이 할머니’ 같았는데, 그렇다고 욕쟁이 할머니 특유의 강한 겉모습에 숨겨진 따뜻한 내면이 반전처럼 드러나는 장면을 찾기도 힘들었다. 


HBO에서 드라마로도 제작 방영되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은 인물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녀의 어떤 점에 사람들이 매료되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의 꾸밈없는 솔직함이 통쾌함을 안겨주었던 걸까? 내게 올리브 키터리지는 솔직함을 넘어서 자기중심적이며 뻔뻔하고 무례한 인물로 다가왔다. ‘절대로 사과하는 법이 없는 사람’(p.234). 소설 속 누군가의 말이 암시하듯이 말이다.      


HBO 드라마 <올리브 키터리지>




하지만 위와 같이 그녀를 단정 짓고 나자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어쩐지 그녀를 이해해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것 같다는 죄책감이 들었고 그녀를 변호하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올리브가 스스로 ‘세상에서, 이 이상하고 불가해한 세상에서 그녀는 자신이 대체 누구라고 생각했던 걸까?’(p.293)라며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 애쓰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 속 모든 등장인물이,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렇듯, 다만 조금 더 억척스럽게. ‘정말 어려운 게 삶’(p.124)이니 말이다.      


때때로, 지금 같은 때, 올리브는 세상 모든 이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걸 얻기 위해 얼마나 분투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필요한 그것은 점점 더 무서워지는 삶의 바다에서 나는 안전하다는 느낌이었다.(p.378)     




그래서 나는 <다시올리브>(문학동네, 2020)를 집어 들었다. <다시, 올리브>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십일 년 만에 발표한 <올리브 키터리지>의 후속편이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메인 주 바닷가 마을 크로스비 주민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이 펼쳐졌고, 그 속에서 올리브는 이제 팔십 대 노년의 삶을, 죽음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올리브의 ‘올리브다운’(p.269) 태도는 여전했지만, 헨리 키터리지에 이어 잭 캐니슨까지 두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그녀는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었고 아들 크리스토퍼와의 어긋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제 올리브는 울기도 자주 울었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고 넘어가기도 했으며 노년의 친구에게 곁을 내어주기도 하는 조금 유연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성숙해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닫혔던 마음이 조금씩 열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껏 그녀가 ‘나름의 방식’으로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해왔고, ‘나름의 방식’으로 삶을 견뎌왔음을 깨달았다. 다만 그 ‘나름의 방식’이 내면의 두려움을 가리기 위한 자기방어 기제로서의 거칠고 강한 겉모습이었고, 그러한 태도가 그녀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올리브는 뒤늦게 깨닫는다. ‘자신을 즐겁게 만들어주지 않은 것은 그녀 자신이었음을.’(p.459) 아프지만 놀라운 성찰이다.  

    

소설에서 크리스토퍼의 두 번째 아내 앤은 올리브가 ‘항상 나르시시스트’(p.142)였다고 말한다. 올리브는 사전에서 나르시시즘을 찾아보고는 ‘자기 예찬’과 ‘성격 장애’라는 설명에 분개한다. 그리고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올리브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도 않은 앤이 ‘항상’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것이 부당하다고 느꼈다. 그러고 보면 어떤 식으로든 내가 그녀를 규정했던 말들도 – 미국판 욕쟁이 할머니, 자기중심적이며 뻔뻔하고 무례한 인물 – 오해와 편견에서 비롯된 성급한 판단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올리브가 “당신이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나도 나를 모르는데”라며 항변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어쩌면 우리는 타인을 너무 쉽게 판단하고 배척하면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내가 특정한 사람을 ‘나와는 맞지 않은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내 삶에서 배제해온 듯이 말이다. 다른 사람에겐 가혹하리만치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하면서 반면에 나 자신에겐 너무 관대한지도 생각해볼 주제다. 아마도 우리는 타인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을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다. <다시, 올리브>의 마지막에서 노년의 올리브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적는다.      


내게는 내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어떤 단서도 없다. 진실로 나는 한 가지도 알지 못한다.(p.460)      

<올리브 키터리지><다시, 올리브>를 통해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삶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사람 사이의 관계가 전부고, 나하고는 다른 생각과 성향의 사람도 끌어안으려는 관대한 마음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올리브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너무 늦기 전에 깨닫게 해줘서 올리브, “당신을 만나서 정말로 다행”(p.446)이에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올리브 키터리지>, <다시, 올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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