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연미 Aug 06. 2019

소음으로 각인된 기억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의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읽고

*본 서평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에게 뉴욕은 한 시간 간격으로 요란하게 울리던 사이렌 소리로 기억된다. 근거도 없는 막연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던 소음. 그때 나는 이 도시가 곧 폭발할 것만 같다고 느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뉴욕에 머물렀던 기간은 2001년 7월에서 8월까지 두 달이었다. 8월 31일 비행기로 한국에 귀국했다. 그로부터 채 2주가 안 되는 시점에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 내리는 장면이 전 세계로 송출됐다. 나는 집 거실에서 TV로 그 뉴스를 보며 ‘이건, 영화 일거야’라고 생각했다.


귀국하기 불과 며칠 전, 나는 그곳에 있었다. 지하 아케이드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쇼핑을 하고, 빌딩 앞 공터에서 왈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두 손을 맞잡고 왈츠를 추던 노인들의 모습이 참 평화로워 보인다고 생각했었다.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처참하게 붕괴되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왈츠를 추던 사람들의 모습과 뉴욕의 사이렌 소리가 뒤섞여 재생됐다. 그 이후 911 테러가 언급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기억이다. 내 삶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어야 했던 먼 나라의 일이 ‘내 기억의 일부(p.112)’가 된 것이다. 이후 세계는 테러와 대테러 전쟁으로 점철되었고 지금까지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포와 총소리와 폭탄 소리에 파묻힌 도시에서 두려움에 젖어 어른이 되는지(p.347) 그 수를 가늠조차 할 수 없다.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의 소설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문학동네, 2016)>은 콜롬비아 전역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1980~90년대 마약 전쟁 이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수도 보고타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 젊은 대학 교수 안토니오 얌마라는 우연히 알게 된 한 남자, 리카르도 라베르데와의 짧은 교류로 인해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모르는 채 비극적인 사건에 휘말린다. ‘외상 후 스트레스’와 ‘광장 공포증’에 시달리던 그는 현장에서 살해당한 리카르도의 과거를 추적하고, 자신이 겪은 일이 상상도 못 했던 과거의 시대적 비극과 맞닿아 있음을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블랙박스에 담긴 추락하는 소음 - 소멸되는 생명들의 소음과 높은 곳에서 물건들이 떨어질 때 나는 소음(p.111) - 을 듣게 된다. 그리고 국가의 서글픈 역사로 오염된(p.294) 그의 삶도 조각조각 흩어져 추락(p.83)하게 된다. 리카르도와 그의 아내 일레인, 딸 마야 그리고 안토니오와 그의 아내 아우라, 딸 레티시아. 거울에 반사된 것처럼 닮은 이들의 비극은 세대의 유산처럼 과거에 일어났지만 미래에도 일어날 수 있음을 명징하게(p. 16) 증언한다. 땅으로 곤두박질친 개인의 삶에는 안타깝게도 참고할만한 블랙박스도 전혀 없다(p.338).


그리고 기장이 말했다. "위로, 위로, 위로."
(...) 그 소음은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곳에서 시작된 내 추락 소음이 아니었을까? (p.338)


어떤 시대적 사건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건의 중심에 끌려들어 갔던 사람들은 평생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그의 주변인들은 동정과 비난의 양가적 감정을 가진 채 그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간다. 어떤 역사적 비극은 한 세대 전체의 공포와 슬픔으로 각인되기도 한다. 우리 세대에게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그럴 것이다. 확인되지 않은 오보들의 소음이 난무하고 정부와 책임자들이 대책 없이 허둥거리며 사고를 방관한 그날, 우리 사회의 안전에 대한 믿음도 함께 가라앉았다. 이후 우리는 ‘기만당한 자의 분노’(p.48)와 어딘가 원인과 책임을 따질 곳이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며, 누구에게 언제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는 시대를 살고 있구나 체념했다. 더 이상 이 땅에서 아이들을 보호할 수 없다 느낀 이들은 소설 속 콜롬비아 사람들처럼 이 나라가 싫고 두렵고 위협으로 느껴져 떠났다.


우리 사회는 지금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걸까. 사회 구성원을 안전하게 보호할 항로를 이탈해 '필연적인 추락'(p.164)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사고’, ‘우연’, 가끔은 ‘운명’이라는 단어(p.290)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비극으로부터 우리의 아이들을 멀리 떼어놓고 키울 수 있는 안심할 수 있는 사회에 대한 물음을 이 책을 통해 던지게 된다.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 _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매거진의 이전글 과학서의 '떨림'을 인문학적 '울림'으로 전달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