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전혀아니다, 별로아니다, 가끔그렇다, 항상그렇다>(엘리자 히트맨)
엘리자 히트맨 감독의 영화 <전혀아니다, 별로아니다, 가끔그렇다, 항상그렇다(Never Rarely Sometimes Always)>(2019)를 두 번째로 보았을 때, 나는 화가 치밀어 자주 영화를 멈춰야 했다. 장면 장면에 여성을 향한 일상적 폭력이 만연해있었고 십 대 소녀들은 사회적 안전망도 없이 위협에 노출된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영화의 감상이 연민을 넘어 분노의 감정으로 귀결된 건, 이것이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펜실베니아주 시골 마을에 사는 17세 소녀 오텀이다. 학교 발표회에서 기타를 메고 노래를 부르는 오텀은 짙은 무대화장을 하고 나왔어도 영락없는 청소년이다. 그녀의 공연은 남학생의 짓궂은 장난(너무 완곡하게 표현했다. 명백한 성희롱이었다)으로 중단되지만, 관객석에 앉은 누구도(심지어 오텀의 부모도) 그를 나무라지 않는다. 선생과 학생, 학부모 들 앞에서 모욕을 견뎌야 하는 건 오히려 오텀이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공연을 마친 그녀에게 관객은 박수를 보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분위기다.
수치스럽고 굴욕적인 상황은 이뿐이 아니다. 시골의 가난한 십 대 소녀들에겐 일상이다. 오텀이 절친인 스카일라와 함께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는 호의를 가장한 손님의 치근덕거림이 빈번하고 윗사람의 성추행은 아예 노골적이다. 가정 안에서도 아빠의 성적인 농담과 언어폭력을 수시로 들어야 하고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공공장소에서의 희롱은 말할 것도 없다. 이들은 스스로 경계하고 피하거나 추행을 당하고도 적당히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 이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지닌 어른들은 무력한 방관자이거나 혹은 악질의 가해자였다. 믿고 의지할 데라곤, “남자였으면 할 때 없어?”라는 질문에 “항상 그렇지.”라고 답하는 서로밖에 없다.
여성이라서 늘 긴장하고 방어적으로 살아야 하는 건 비단 저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여성이라면 누구나 두려움과 수치스러움을 유발하는 외부의 위협을 경험하거나 혹은 목격했을 것이다. 매번 예민하게 반응할 수 없기에 영화 속 소녀들처럼 속으로 삼키고 애써 잊으려 했던 일들도 있었을 것이다.
만연한 폭력은 무력감과 체념을 낳는다. 어쩌면 그래서 처음엔 나도 영화 속 불쾌한 장면들을 외면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어쩔 수 없다 체념했는지도 모른다. 관찰자이자 제삼자의 관점에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이것은 타인의 고통이고 슬픔이다. 하지만 오텀과 스카일라의 자리에 ‘나’를 대입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 순간, 우리는 함께 분노하게 된다.
영화는 또 다른 차원의 폭력도 다루고 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사실을 알게 된 오텀은 동네 산부인과를 찾는다. 여의사는 그런 오텀에게 다짜고짜 낙태 반대 영상(‘가혹한 진실’이라는 제목)을 틀어주고 출산 후 입양을 권한다. 정작 본인의 입장이나 의견은 묻지도 않고 낙태는 태아를 살인하는 것이라며 설득하려 한다. 말투는 상냥하지만 의사 결정을 강요하는 듯한 일방적인 소통은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오텀이 낙태를 결심하고 스카일라와 함께 뉴욕주(임신중절이 합법인 주)의 병원을 찾았을 때도 병원 앞에 어느 종교단체가 위협적인 태도로 낙태 반대 시위를 한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은 무시한 채 태아의 생명권만을 중시하는 이런 언행도 일종의 폭력이다.
신형철 평론가는 자신의 저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폭력’이라는 말의 외연은 가급적 넓히는 것이 좋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한 것이며 타인의 진실이란 얼마나 섬세한 것인지를 편리하게 망각한 채로 행하는 모든 일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p.390) 이 영화는 여성에게, 청소년에게 섬세하기를 포기하고 내비치는 일상의 폭력에 문제를 제기한다.
영화의 제목 ‘Never Rarely Sometimes Always’는 임신중절수술 전 오텀이 심리 검사를 받을 때 나온다. 상담사는 오텀에게 이성 관계와 성생활에 관련된 사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사지선다형에서 답을 고르라고 한다. 당황한 오텀이 “이런 걸 왜 물으시는데요?”라고 묻자 상담사는 “환자분이 안전한지 확인하려는 목적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순간 그때까지 안간힘을 쓰며 버티던 오텀이 무너진다. 시종일관 담담한 표정이었던 오텀이 감정을 드러낸 유일한 장면이다. 그녀의 망설임과 울먹임이 대답이 아닐까. 언제 어디에서도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떤 답을 고를 수 있을까? 네 가지 보기 중 하나로 간단히 답할 수 있는 일일까?
사실 나는 오텀이 누군가 믿을 만한 어른에게 도움을 청했으면, 하다못해 한 번쯤 크게 울어라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는 홀로 모든 걸 감당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오텀의 지친 얼굴을 비추며 끝까지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쉽게 도움받지도 위로받지도 못하는 게 현실이리라. 다음에도 이들은 온전히 혼자서 견디거나 연약하고 위태로운 또래의 연대에 기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텀의 결정을 지지하고 묵묵히 곁을 지키는 스카일라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은 어쩌면 안일한 건지도 모른다. 이들이 나누는 도움이란 서로의 새끼손가락을 걸어 온기를 전하는 정도이니 말이다. 여성들은 안전한가, 라는 질문에 ‘Never Rarely Sometimes Always’ 중 어떤 답을 제출해야 할지 모르겠는 현실이 참담하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보면서 느껴야 할 감정은 연민이 아니라 분노여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