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

최은영 <쇼코의 미소>(문학동네, 2016)

by 이연미


‘나’를 형성하고 있는 것 중에 얼마만큼이 타인에게서 왔을까? 특히 자아를 활발히 형성하는 청소년 시절에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친구라면, 그 영향력은 얼마나 될까? 최은영 작가의 중편소설 <쇼코의 미소>(문학동네, 2016)를 읽고 나면 이런 물음이 떠오른다.




소설의 제목이 암시하듯 이 소설은 화자인 소유의 기억에 ‘분명한 자국’(p.15)을 남긴 쇼코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동시에 소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유와 쇼코는 국적은 한국과 일본으로 다르지만 놀랄 만치 닮아있기 때문이다.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환경도, 아버지가 부재한 가족 구성도, 할아버지와의 애증의 관계까지도 두 사람은 거울상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나의 모습을 비추되 좌우가 바뀌는 거울처럼 단지 소유와 쇼코가 서로를 비춰볼 때마다 처한 상황이 반대였을 뿐이다.


소유와 쇼코는 열일곱, 스물셋, 그리고 서른의 나이에 단 며칠을 함께 보냈다. 살면서 세 번 만난 사이이다. 어떻게 보면 서로의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닌’(p.25)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p.24)는 소유의 말처럼 짧은 교류에도 강한 인상과 무시 못 할 영향력을 남기는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의 인연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현재에 이른다.


소유가 쇼코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이었다. 소유는 일본에서 온 견학생인 쇼코를 ‘친절하지만 차가운 미소’(p.14)를 짓는 아이라고 느꼈다. 그 미소가 소유에게 ‘다 커버린 어른이 유치한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웃음’(p.14)처럼 보였던 이유는, 별다른 꿈이나 포부가 없었던 그녀와 달리 ‘언젠가는’(p.9)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지로 가득한 쇼코의 말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바다를 떠나서, 사방을 둘러봐도 빌딩밖에 없는 도시에 가서 살 거야.”(p.9), “언젠가는 유두 근처에 애벌레 모양 타투를 할 거야.”(p.10) 소유에게 쇼코는 낯설지만 호감이 가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넌 영화 만드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p.15)라고 쇼코가 무심코 전한 말이 소유의 장래 희망이 되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쇼코는 일본으로 돌아간 후 한동안 소유와 소유의 할아버지에게 각각 편지를 썼다. 소유 앞으로 쓴 영어로 된 편지는 언제나 부정적인 내용이었고, 소유의 할아버지께 쓴 일본어 편지는 긍정적인 내용 일색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소식이 끊긴 건, 이러한 쇼코의 내적 분열 증세가 심각한 병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소유와 쇼코가 다시 만났을 때, 두 사람의 모습은 뒤바뀌어 있었다. 쇼코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앓는 지병과 자기 자신의 우울증 때문에 고향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한 상황이었고, 반면에 소유는 예전 쇼코의 바람처럼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교환학생으로 캐나다에, 뉴욕에도 다녀온 상태였다. 현실에 안주한 쇼코를 보며 소유는 ‘이상한 우월감’(p.26)을 느끼고, 쇼코가 예의 ‘그 예의바른 웃음’(p.26)을 지어 보이자 이번엔 ‘나약하고 방어적인 태도’(p.26)라며 실망의 기색을 내비친다. 아마도 그때 소유는 자신은 쇼코와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의 미래는 ‘자유롭고 하루하루가 생생한 삶이 되리라’(p.31) 믿었을 것이다. 영화감독의 꿈이 ‘죄’(p.33)가 될 줄은, 자신의 삶을 기만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테다.


이후 소유와 쇼코의 시간은 각자의 방식대로 흐른다. 그리고 이들은 두 사람 모두 할아버지를 잃고 혼자 남았을 때 마지막으로 만난다. 이번엔 상실감과 우울증을 어느 정도 극복한 쇼코가 소유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 시기 소유는 재능도 아니고 꿈도 아닌 영화감독의 길을 접고 이제 막 긴 방황에 마침표를 찍은 때였다. 할아버지가 생전에 소유의 원룸까지 찾아와 전한 진심 어린 응원이 역설적으로 소유의 현실을 직시하게 했다. 그런 소유에게 쇼코는 소유의 할아버지가 보낸 편지들을 읽어주며 위로를 건넨다.


공항에서 헤어질 때 소유는 쇼코의 미소를 보며 예전에 처음 보았을 때처럼 ‘서늘함’(p.64)을 느낀다. 이 서늘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중심에서 밀려나고 사람들에게서도 밀려’(p.9)난 두 사람이 ‘역시나 대양에서 밀려난 바다의 가장자리’(p.9)인 해변에 서 있는 것 같아서였을까. ‘외톨이들끼리 만나서 발가락이나 적시는 그 기분’(p.9)이 서늘하게 느껴졌던 걸까.


어쩌면 그 서늘함은 두 사람의 삶이 시차는 있었지만 제각기 아픔과 고독의 시기를 거쳐 결국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귀착되었다는 냉철한 인식에서 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소유가 바라본 ‘쇼코의 미소’는 사실 소유 자신의 마음 상태를 비춘 거울이었다. 소유는 쇼코에게서 이상적인 자아와 혐오스러운 자아를 모두 발견했다. 쇼코를 통해 감독이라는 꿈을 향한 욕망을 키웠고, 또한 그 욕망의 실현 불가능성(자신의 한계)도 깨달았다. 자기 자신의 민낯을 응시하는 건 언제나 서늘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따뜻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두 사람이 어느 지점에서는 언어의 장벽이 무색하게 소통하고 공감했으며 서로에게 ‘위안받았다는 사실’(p.59) 때문이다. 누군가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현해탄을 건넜을 때, 이들의 인연은 이어졌다. 나와 너 사이를 가로지르는 심연을 건너 상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용기가 이해를 향한 시작일 것이다.


소유와 쇼코의 이후 이야기를 독자는 알 수 없다. 아마도 둘은 서로에 대한 완벽한 이해에 결코 이르지 못했겠지만, 어떤 꿈은 잃고 어떤 꿈은 이뤘으리라 짐작해본다. 쇼코가 애벌레 모양의 타투를 진짜로 새기고 나타났듯이 말이다. 그 작은 성취에 위안을 얻는 독자가 분명 있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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