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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Feb 27. 2023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시 읽기] 김수영 '봄밤'



봄밤


                          -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 합동시집 『평화에의 증언』 (삼중당, 1957)     




[단상]

김수영 시인의 시 <봄밤> 전문이다. 반복해서 나오는 시구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에서 뜻밖의 위안을 얻는다. “혁혁한 업적”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낮이 가고 밤이 되도록 무언가 이룬 것 없어 애타는 이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아직 계절은 봄이니까 시간은 충분하다고. 조바심과 체념이 복잡하게 얽힌 마음이 이 한 마디에 봄처럼 녹는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김초희 감독은 마음이 불안할 때마다 김수영 시인의 이 시를 필사하며 달랬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는 것 같을 때마다 썼으리라. 중심에 가까워지지 않고 주변부만 돌고 또 도는 듯하거나, 비슷한 행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을 때마다 이 시를 떠올렸을 것이다. 어쩌면 깊은 밤 술도 한잔하면서 꾹꾹 눌러 썼을지 모른다.  

   

그 마음을 알 것 같아서, 나도 오랜만에 필사를 했다.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를 옮겨 적을 때는 시인이 특별히 ‘나’에게 당부하는 것만 같았다. 작가와의 거리감 상실, 여기에 필사의 묘미가 있다. 그러고 보면 봄도, 인생도, 영감도 서두른다고 먼저 오지 않는다. 어두운 밤의 시기가 지나면 빛이 비치리라는 믿음으로 그저 묵묵히 한 자 한 자 필사하듯 나아가는 “절제”의 미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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