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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Jun 29. 2023

난민, 그중에서도 아동은 사회의 최약자다

영화 <토리와 로키타>(다르덴 형제, 2023)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부 장터에서 동전 두 개에 아버진 생쥐 한 마리를 샀네. 그런데 고양이가 와서 생쥐를 먹어버렸네. 동부 장터에서 아버지가 산 그 생쥐를. (...)그런데 개가 와서 그 고양이를 물었네. 아버지가 산 생쥐를 먹어버린 그 고양이를. (...)그런데 나무 지팡이가 나타나서 개를 때렸네. 아버지가 산 생쥐를 먹어버린 고양이를 물고 있는 그 개를. (...)”     


토리와 로키타가 5유로를 벌기 위해 레스토랑에서 부른 이 노래는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검은 화면 위로 다시 흐른다. 노래는 관객에게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데, 한편으론 비극으로 치닫기 전 두 사람이 아직 행복했던 시절을 소환해 먹먹한 슬픔을 안겨 주고 다른 한편으론 가사를 곱씹게 하면서 점층적으로 고조되는 분노를 일으킨다. 격한 감정을 추스르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는가’를 사유하다 보면, 난민 아동들의 비참한 현실과 제도 개선의 필요성이라는 노장 감독의 문제의식에 닿게 된다.    

  

관객의 머릿속에 각인되는 이 돌림노래의 가사는 '생쥐<고양이<개<지팡이<불'로 이어지는 먹고 먹히는 관계를 그리고 있다. 이는 영화 속에서 토리와 로키타를 둘러싸고 사회에 겹겹이 포진해 있는 포식자들을 연상시킨다. 수시로 찾아와서 빚을 갚으라고 협박하고 돈을 빼앗는 종교단체로 위장한 밀입국 브로커, 토리와 로키타를 마약 운반책으로 이용하는 것도 모자라 성적 학대까지 서슴지 않는 레스토랑 주인이자 마약상, 딸을 해외에 불법 취업시키고 번 돈을 고스란히 고향에 부치기를 독촉하는 어머니까지. 온갖 착취와 폭력, 학대에 노출된 토리와 로키타는 노래 속 생쥐나 다름없다.      





토리와 로키타의 일상이 내내 아슬아슬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영화의 마지막 로키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관객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다. 영화가 체류증을 받기 위해 인터뷰에 임하는 로키타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시작해 줄곧 그녀의 행보를 따라왔기에 관객도 그녀에게 이입해왔기 때문이다.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한 로키타가 가짜 체류증을 얻기 위해 대마초 재배 시설에 감금되어 일하게 되었을 때까지도 이와 같은 최악의 결말은 상상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충분히 예상되는 비극임에도 ‘가사 도우미가 되어서 토리와 한집에 살겠다’는 로키타의 꿈을 응원한다며 무턱대고 낙관적인 전망을 믿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에서도 다수에 속하는 이들은 무책임한 낙관론을 펼치며 사회적 약자에게 위험이 감지되어도 방관하거나 외면하니 말이다.     


마약 조직원의 총에 로키타는 죽고 토리는 살아남는다. 토리의 말처럼 이제 그는 ‘외톨이’다. 로키타의 장례식장에서 토리는 생전에 그녀가 불러주던 자장가를 부른다. 눈물조차 흘리지 않는 토리는 그저 막막한 표정으로 로키타가 누운 관을 응시한다. 카메라가 그 텅 빈 얼굴에 머물러 있는 동안, 나는 그제야 혼자 남은 토리의 입장을 헤아려보다. 태어나면서 엄마가 죽는 바람에 주술사 아이라며 학대를 받은 아이. 보육원에 버려진 뒤에도 목숨의 위협을 느껴 바다 건너 벨기에까지 오게 된 아이. 토리가 행동이 재빠르고 머리가 비상한 것은, 무엇보다 아무런 낌새도 없이 잘 숨어있는 건 바로 그런 과거의 경험에서 아프게 습득한 생존 기술일 테다. 토리는 로키타를 생사의 갈림길 같은 난민 보트에서 만났다. 아마도 로키타는 토리에게 애정과 관심을 쏟은 첫 존재이자 그를 보호해줄 유일한 가족이었을 것이다. “선생님, 누나 없이 여기서 어떻게 살죠? 왜 체류증을 안 줘요?”라는 토리의 외침이 여전히 귓가에 울린다.    




 

타인의 고통을 재현할 때 그것은 언제나 축소되기 마련이라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난민 아동의 비참을 영화화하면서 감독도 윤리적인 문제에 봉착했을 것이다. 연민의 감정에만 머물러도, 정치적인 외침으로만 들려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비슷한 맥락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의 정치철학자 하시가와 분조가 논한 ‘죽은 아이’와 ‘아이의 죽음’의 차이에 대해 정희진 여성학자가 언급한 글도 생각난다. 부모에게는 죽은 아이가 중요하지만, 아이의 죽음만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다면서 타인의 고통 혹은 죽음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한 글이었다.      


나는 다르덴 형제 감독이 정치적인 행동이나 변화를 촉진하기 위해 난민 아동의 죽음을 이용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은 아이’라는 구체적인 슬픔과 ‘아이의 죽음’이라는 사건의 중대함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죽은 아이’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아이’의 미래에 대한 사회적 고민도 촉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제목에 아이들의 이름, ‘토리’와 ‘로키타’를 올린 것도 그런 제작 의도를 담은 게 아닐까.


지난 6월 20일은 UN이 제정한 ‘세계 난민의 날(World Refugee Day)’이었다. 불과 며칠 전인 14일엔, 그리스 연안에서 750여 명을 태운 난민선이 침몰했다. 100여 명이 구조된 가운데 여성과 아동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후속 뉴스가 들려왔다. 조사에 따르면, 이들은 ‘보호’라는 명목 아래 갑판 아래층 화물칸에 사실상 감금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비극의 현장에도 또 다른 토리와 로키타가 있었다. 토리와 로키타는 지구상 어디에도, 지금 우리 주변에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감독의 의도대로 난민, 그중에서도 최약자인 아동을 향한 관심 증대와 제도 개선을 위한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토리와 로키타>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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