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고골의 <코>를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처럼 괴상한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p.25)
고골의 <코>(<<외투>>, 민음사, 2017)를 읽은 독자의 마음이 딱 이렇지 않을까? 꼬발료프 소령의 ‘코’는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없이 떨어졌다가 약 2주간의 방황 끝에 역시나 갑자기 다시 제자리에 붙는다. ‘코’는 이발사의 구운 빵 속에 들어갈 정도의 사이즈였다가(아마도 실물 사이즈) 사람 크기만큼 커져서는 거리를 활보하더니 다시 경찰의 호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작아져서 돌아온다. 제 주인은 8등관인데 ‘코’는 무려 세 등급이나 높은 5등관의 복장을 입고 돌아다녔고, 여행(갑자기 여행을?)을 떠나려다 경찰에 체포됐다. 이 무슨 황당한 전개인가?
독자를 더욱 당황케 하는 건, 이 같은 비현실적인 사건에 반응하는 인물들의 방식이다. 빵 속에서 ‘코’를 발견한 이발사 이반 야꼬블레비치는 어떻게 알았는지 ‘아는 사람의 코 같았다’(p.17)고 하더니 꼬발료프가 그 주인임을 확신한다. 이발사의 아내는 한술 더 떠서 이미 예견된 일이라는 듯(이런 황당한 일을 어떻게 예견할 수 있단 말인가) 남편이 면도하다가 남의 코를 잘라 왔다며 분노하면서 내다 버리라고 한다. 둘 다 그다지 크게 놀라지도 않고 주인에게 돌려줘야겠다는 이성적인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꼬발료프가 ‘코’를 수배하는 광고를 내겠다며 찾아간 신문사의 관리는 신문의 명예가 떨어진다며 거절하더니 어이없게도 ‘코’도 없는 꼬발료프에게 코담배를 권한다. 경찰서장은 꼬발료프의 하소연을 건성으로 들으며 ‘똑똑한 사람이라면 코를 떼이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p.40)는 헛소리만 지껄인다. 다시 돌아온 ‘코’를 제자리에 붙여달라고 부른 의사도 제 일을 하기는커녕 ‘코’를 팔라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한다.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사건 해결에 일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꼬발료프의 ‘코’가 거리에 나타난다는 황당무계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의 태도는 또 어떤가. “어째서 세상 사람들은 이런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소문을 가지고 법석을 떠는 걸까?”(p.52)라며 겉으론 비판하면서도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코’를 찾아 구름처럼 몰려다닌다. 누구 하나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없다. 그나마 소문을 빌미로 돈을 벌려는 상인들과 ‘코’를 찾아주고 답례금을 요구하는 경찰이 현실적이다.
사실 멀리 갈 것 없이 ‘코’를 잃어버린 당사자의 반응이 가장 우스꽝스럽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자신의 ‘코’와 마주치고도 자신보다 지위가 높아 보인다며 우물쭈물 말도 제대로 걸지 못한다. 어렵게 “...귀하는 바로 제 코가 아닙니까?”라고 말을 붙였다가 “당신은 실수하고 있소. 나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오.”(p.28)라고 ‘코’ 신사가 되받아치자 당황해서 물러선다. 이 와중에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예쁜 여자(성당에 나타난 날씬한 부인, 신문에 실린 극장 광고의 여배우)에게 한눈을 파는 것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소설 속 사건을 겪고 나면 인물은 어떤 식으로든 변화한다는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다시 제자리에’(p.53) 돌아온 ‘코’처럼 꼬발료프 소령도 그 후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떠한 장소에도 거리낌없이 나타났다’(p.56)고 한다. 경찰서장의 말처럼 ‘제대로 자기 자리도 지킬 줄 모르면서 여기저기 무례한 장소를 찾아다니는 소령’(p.40)으로 돌아간 것이다. 예쁜 여자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도, 허영과 허세도(훈장도 없으면서 훈장에 다는 리본을 산다) 이전과 그대로다. 이 인물은 고난을 겪고도 얻은 교훈이 없다.
그런데 서술자는 이 이야기엔 하나 이로운 것이 없다면서도 ‘그러나 생각하고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 속에는 분명히 무엇인가가 내포되어 있다’(p.58)며 슬며시 암시를 준다. 무슨 수수께끼도 아니고 무엇이 내포되어 있단 말인가? 이것 또한 서술자의 말장난(러시아어에서 코(COH)의 철자를 거꾸로 하면 꿈(HOC)이다.)이고 허세인 걸까?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안개 속에 묻어버리고 미궁에 빠뜨리고... 고골의 서술자는 당최 믿을 수가 없다. 이 작품을 분석한 조지 손더스의 말처럼, 모든 이야기는 잘못 서술되기 마련(주관적으로 서술하기에)이니 ‘고골은 말한다, 기쁜 마음으로 잘못 서술하자.’(<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p.442)
그렇다면 독자도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기쁜 마음으로 잘못 해석하자.” 꼬발료프의 ‘코’가 그의 출세 욕망이나 남성성을 상징한다거나, 이 소설은 당대 러시아의 관료주의와 속물적인 인간들을 비판하고 있다고도 분석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코’가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인격으로 읽혔다. ‘코’는 여러모로 제 주인보다 나은 존재였다(바꿔 말하면, 꼬발료프는 제 ‘코’보다 못한 인물이다). 단지 5등관이라는 계급 때문이 아니라, 주인을 떠나는 것도 제자리에 붙는 것도 모두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주인 앞에서도 당당한 태도로 제 의견을 말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코’는 제 주인이 부끄러워 그를 영영 떠나기 위해 여행을 계획했는지 모르고, 변하지 않는 주인이 진저리나서 언젠가 또다시 그를 떠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꼬발료프의 심정은 어떨지, ‘코’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지 자못 궁금하다. 실제로 ‘코’는 잠시 숨을 고르며 치밀한 탈출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골의 말대로, 이와 비슷한 일들은 ‘드물긴 하지만 있을 수 있는 일’(p.58)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