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황정은, 2006)를 읽고
세 남매의 아버지는 자주 모자가 되었다.(p.39)
황정은의 단편 소설 <모자>(<<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 문학동네, 2014)의 첫 문장이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소설 속에서 남매의 아버지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모자가 된다. 집에 못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틀림없이’(p.39) 모자가 되고, 이삿짐을 나르다가도 모자가 되고, 텔레비전 앞에서도 모자가 된다. 남들이 보는 데서도 모자가 되는 바람에 소문이 나서 가족은 자주 이사를 다닌다. 아버지는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모자가 되었다가 얼마쯤 지나면 아버지로 돌아오곤 한다. 한 번은 남매가 아버지에게 묻기도 했다. “아버지는 왜 모자가 되는 걸까요.” 아버지의 대답은 이랬다. “나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좋아서 모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아버지에게 남모르는 사연이 있는 것만 같다.
세 남매는 아버지가 언제부터 모자가 되었는지 서로의 기억을 더듬는다. 죽은 어머니의 기억과 할머니의 기억까지 풀어놓는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모자가 된 듯한데, 그 상황들을 나열하다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이가 없을 때, 누군가의 앞에 나서기가 초라할 때, 무언가를 ‘못’하게 되었을 때(그래서 ‘못’ 앞에서 모자가 되는 걸까) 등등. 아버지는 좌절감이나 무력감에 사로잡히면 모자가 되는 듯하다. 모자는 낯을 가리기에 사람을 지운다. '모자가 되었을 때의 아버지는 조용했다.'(p.47) 아무 말도 없이 침묵하며 가만히 한자리에 고정된 사물 같은 사람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모자로 변하는 건 본인도 어쩔 수 없는 일인데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일임에도, ‘모두가 볼 수 있는 장소에서 모자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p.42)이라고 이웃은 항의한다. ‘정상’이라는 범주를 정해놓고 그 외부에 위치하는 남다른 존재를 이해보다는 배척하려는 사회의 시선을 꼬집고 있다. 사람이 사물로 전락한다는 건, 그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세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무시와 배제가 그를 아무것도 ‘못’하는 아버지로 만든 건 아닐까.
그래도 그에겐 아버지가 모자로 변신할까 봐 이사하면 집안의 못부터 뽑는 자식이 있다. 모자로 변한 아버지를 그림으로 그려둔 자식도 있고, '이것 봐. 나도 모자가 될 것 같아.‘(p.63)라며 아버지와 동질감을 느끼는 자식(그렇다고 모자로 변하진 않는다)도 있다. 카프카의 <변신>에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까지 벌레로 변한 주인공에게 등을 돌린다. 심지어 그가 죽도록 내버려 두고 죽자마자 가뿐한 마음으로 여행을 떠난다. <모자>의 아버지는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특수한 상황에 불평하지 않고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세 남매가 있으니 말이다.